3년 전 '충북여중 스쿨 미투'를 고발한 A 씨는 수사 과정에서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이름은 물론, 성도 바꿨습니다. 가해 교사가 자신을 알아보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현행법은 성범죄 피해자가 2차 가해에 노출되는 일이 없도록 수사와 재판에서 가명을 쓸 수 있게 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가해 교사는 A 씨가 피해자임을 확신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법정에서 A 씨를 쳐다보며 "너도 알지 OO아?"라고 묻는 건 물론, 하루는 부모님에게 발신자도 없는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그곳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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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2013323 "어떻게 16살밖에 안 된 학생의 영혼이 그렇게 타락할 수도 있는지요?" "A 씨가 충북여중에서 저지른 행위는 엄청난 범죄이고,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검찰이 피해자 '성(姓)' 노출
피해자 A씨 측에 온 편지 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습니다. 한 학년이 150명에 불과한 작은 학교에서 조금만 퍼즐을 맞추면 충분히 고발인을 알아낼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미투 의혹을 고발한 지 2년, A 씨는 자신에게 발생한 일들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항소심 과정에서 드러난 검찰 의견서를 보게 됐는데, 이런 대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증인신청서 작성 및 제출 과정에서 OOO와 △△△은 성(姓)이 노출되는 실수로 인해 피고인이 피해자들의 인적사항을 특정할 수 있게 되어버렸습니다" 검찰 의견서 中 A 씨는 전교생 중 자신과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 단 두 명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검찰의 실수로 A 씨의 성이 드러나자 가해자가 피해자를 특정하는 건 더욱 쉬워졌습니다.
A 씨는 "재판장도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1심 당시 가해자 측 가족이 참석한 재판에서 재판장은 피해자를 향해 "증인이냐"고 물었습니다. 당황한 피해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가해자 가족은 A 씨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재판이 끝나자 가해자의 부인과 동료들은 A 씨를 향해 '가정이 파탄 날 위기에 처했다'며 원망의 말을 쏟아냈다"고 합니다.
◆'성범죄 피해자 보호법' 제정 10년…현장에선
피해자 A 씨는 검찰과 재판부의 이런 행동은 실정법 위반이라고 주장합니다. 성범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은 지난 2011년 제정됐지만 A 씨 사례에서 보듯 여전히 현장에선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외에도 A 씨가 겪어야 했던 2차 피해는 헤아리기도 어렵습니다.
"원래 그 선생님이 열정이 넘치잖아,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라거나
"정말 그 선생님이 그런 게 맞아?" A 씨는 학교에 다니는 내내 동료 교사들로부터 이런 질문들을 들어야 했습니다.
피해자 A씨 인터뷰 中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는 사실 피해자가 피해를 수사기관에 알리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정말 그 일이 있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따라선 객관적 증거가 없고, 피해자의 진술이 범죄 성립 여부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증거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는 가해자 측의 공격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A 씨는 수사기관으로부터 피해자 보호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도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약 3년에 걸친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가명 조사'에 대해 A 씨가 들은 설명은 "가명을 만드시는 게 좋아요" 이 한 마디가 유일했다고 합니다.
취재가 시작되자, 당시 재판장이 속해있던 청주지법은 별다른 입장을 내지 않았지만, 청주지검은 내부조사에 착수하기로 했습니다.
'스쿨미투 피해자 신상정보 노출' 검사·판사 징계 요구 및 2차 가해자 처벌 촉구 기자회견 이번 일이 단순히 검사와 재판장의 '실수'로만 끝나선 안 될 일입니다. A 씨가 변호인을 선임해 지난 22일 국민권익위에 검사와 판사에 대한 징계를 요청하고, 이들을 공수처에 고발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A 씨는 두 사람의 처벌이 목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는 성범죄 피해자들이 2차 가해에 노출되는 일이 없도록 "피해자 보호 제도를 정착시켜달라"고 당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