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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썰] 병원도 외면한 수급자…'응급실 뺑뺑이' 잔혹사

입력 2024-09-03 06:00 수정 2024-09-03 08:01

취재 현장에서 접한 '응급실 뺑뺑이' 실태
취약계층에 더 잔인했던 여름
의사도, 구급대원도 "붕괴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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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현장에서 접한 '응급실 뺑뺑이' 실태
취약계층에 더 잔인했던 여름
의사도, 구급대원도 "붕괴 직전"

〈사진=JTBC 보도 캡처〉

〈사진=JTBC 보도 캡처〉


지난 7월 31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도봉구 쌍문동의 한 편의점. 한 40대 남성이 문을 열었습니다. 부들부들 떠는 몸, 발걸음은 비틀거렸습니다. 편의점 관계자는 “몇 년 단골인데, 그렇게 아픈 모습은 처음이었다. 걸을 때마다 발목이 꺾였다”라고 했습니다.

담배와 음료를 사러 왔다는 남성은 냉장고 문을 열다 한차례 휘청거린 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119 구급대원들이 체온을 재봤더니 40도였습니다. 의사소통이 어려웠고 열사병 증세를 보였습니다.

구급대원들은 난감했습니다. 신원 파악이 쉽지 않았습니다. 연락 닿는 가족도 없었습니다. 갈 수 있는 병원도 없었습니다. 소방 관계자는 “병원 14군데에 연락을 했는데 의료 파업 때문에 수용이 어려웠다”라고 했습니다. 1시간 40분 만에 국립중앙의료원으로 옮겼지만 숨졌습니다. 의료진은 사망 이유를 온열질환으로 적시했습니다.

취재의 시작은 '수급자' 한 마디…현실은 더 가혹


“도봉구 40대 사망자, 수급자였어요. 서울시가 이것 때문에 난리가 났어요.”

JTBC는 지난달 8일 ['열사병'으로 쓰러진 기초생활수급자…받아줄 병원 헤매다 사망]이란 제목으로 이 남성의 사연을 보도했습니다.
(관련 기사 : https://news.jtbc.co.kr/article/article.aspx?news_id=NB12209590)

이 사연, 응급실 뺑뺑이 때문에 취재한 건 아니었습니다. 당초 취재진의 안테나에 감지된 단어는 '수급자'였습니다. 이 남성은 올여름 서울에서 발생한 첫 온열질환 사망자였습니다. 처음엔 나이와 지역 정도만 알려졌지만 취재 중 이 남성이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는 취약계층이라는 점을 알게 됐습니다.

〈사진=JTBC 보도 캡처〉

〈사진=JTBC 보도 캡처〉


대부분의 온열질환 사망자는 고령이고, 야외에서 노동하다 숨을 멈춥니다. 이 사례는 여러모로 기존의 틀을 벗어났습니다. 40대의 젊은 나이, 온열질환, 수급자, 사망 장소는 편의점.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연결고리를 더듬어가다 보니 드러난 진실은 상상했던 것보다 크고 가혹했습니다.

'쓰레기집'에 살았던 남성...가족도 외면한 죽음


소방 관계자와 목격자는 이 남성이 '쓰레기집'에서 살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남성이 살던 곳은 편의점 맞은편 다세대 주택이었습니다. 출동한 구급대원이 이 남성을 임시로 눕히기 위해 편의점 자택 대문을 열었지만 방 안이 온통 쓰레기로 가득 차 발 들일 수 없었다 합니다. 확인되지 않았지만 냉방시설을 갖추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2017년부터 수급자가 된 남성. 어떤 사연으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과 등을 지고 살아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생계활동을 하긴 했지만 구청 측은 “개인정보”라며 말을 아꼈습니다. 기저질환은 없었지만 알콜중독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사례관리를 받아 왔다고 했습니다. 관할 구청 측은 “무더위쉼터에 대한 안내도 해드리는 등 주기적으로 소통해왔다. 하지만 무더위쉼터도 스스로 움직여야 가는 것이니 그 이상 강제할 도리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사진=JTBC 보도 캡처〉

〈사진=JTBC 보도 캡처〉


남성의 죽음은 여러모로 쓸쓸했습니다. 생사를 가르는 순간 남성 옆에는 가족도 친구도 없었습니다. 남성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한 건 생면부지의 구급대원들이었고, 임종을 지킨 건 일면식 없는 의료진이었습니다. 구청 측은 “이후 뒤늦게 친누나에게 연락이 닿아 시신을 인계했다”라고 했습니다.

구급대원도, 의사도 "붕괴 직전"...정부는 "관리 가능"


이 보도 이후에도 제 때 병원에 가지 못해 사망한 사례가 속출했습니다. 지난달 20일 충남 천안의 한 아파트에서 쓰러진 뒤 사망한 60대 여성, 119 구급대가 19차례 전화를 돌린 끝에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습니다.

(관련 기사 : '체온 40도인데' 병원 19곳서 거부…또 '응급실 뺑뺑이' 사망 https://news.jtbc.co.kr/article/article.aspx?news_id=NB12211394)

〈사진=JTBC 보도 캡처〉

〈사진=JTBC 보도 캡처〉


구급대원들도 벼랑 끝에 섰습니다. 지난달 23일, 서울 소방 노조는 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구급대원들과 응급실의 통화 녹음을 공개했습니다. 통성명이 끝나기도 전에 "안 된다" "사람이 많다" "다른 병원으로 가라"며 거절하는 병원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소방 관계자들은 "'응급실 뺑뺑이' 문제가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지금은 차원이 다르다"라고 했습니다. "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정도로 피부로 느끼기는 처음"이라 했습니다. 실제로 올 상반기 '응급실 뺑뺑이'로 숨진 환자의 수가 지난해 전체보다 많다 했습니다.

〈사진=JTBC 보도 캡처〉

〈사진=JTBC 보도 캡처〉


의료진들도 막다른 길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남궁인 교수는 지난 23일 페이스북에 아비규환의 응급실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했습니다. 교통사고로 팔다리가 터져나간 젊은 환자가 수도권의 모든 병원에서 거절당한 사례 등을 썼습니다.

그러면서 "현재 내 업무는 응급 진료 체계 붕괴의 상징"이라고 썼습니다. 중증 응급환자를 치료하는 권역응급센터의 당직 의사가 혼자라고 했습니다. 디스크가 터지고 시력이 악화되어도 쉴 수 없다 했습니다. 그는 "현재 의료 체제는 시한폭탄"이라며 "아득바득 막아내는 내 존재가 시한폭탄을 증명한다"고 적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국정 브리핑에서 "여러 문제가 있지만 진료 체제가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관리 가능한 상황이라는 입장입니다. 대통령실은 어제(2일)도 "명확한 근거 없이 응급실 뺑뺑이로 사망사고가 늘었다는 주장은 의료진 사기를 저하하고 불필요한 국민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의정갈등 6개월, 정부가 좀처럼 해법을 찾지 못하는 이유가 이런 현실 인식에 있는 것이 아닌지 모두가 의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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