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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취재썰]"욱했다" 술술 말하는 살인범...'계획'을 부인하는 '계획' 유행, 판례는 없어

입력 2024-08-10 07:00 수정 2024-08-1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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빡빡머리를 깎은 남성이 어깨를 움츠리고 피고인석에 들어옵니다.

검사가 말하는 자신의 범행을 고개 숙이고 듣습니다. 얼핏 '죄를 뉘우치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검사가 수사한 결론을 말합니다.

그다음 피고인의 변호사의 차례. 혐의를 부인한다고 합니다.

사람을 죽인 건 맞지만, 계획한 건 아니라는 겁니다.

판사가 피고인에게도 같은 생각인지 묻습니다.

고개를 퍼뜩 치켜들더니 태도가 180도 변합니다.

"공소사실에 대해 말씀드리면 들어가서 1회 배를 찌르고 도주 과정에서 비상계단에서 옥신각신하다가... (계속 말함)"

술술 말합니다. 누군가를 잔혹하게 죽인 그 순간을 아무렇지 않게 곱씹으며 세세하게 반박합니다.
 

#수시로 협박했는데 '살해 마음 먹은 적 없다'

〈출처=서울경찰청〉

〈출처=서울경찰청〉


이 피고인, 헤어지자고 한 여성 A 씨와 A 씨의 딸을 죽인 박학선입니다.

방청석에 있던 유족은 '계획 범행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박학선을 보며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분노했습니다. 그들의 눈동자에 담긴 박학선의 모습엔 '인간의 탈'은 벗겨져 있었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박학선은 A씨가 '가족이 반대한다'며 이별을 통보하자 사건 전부터 수시로 폭언을 하고 전화를 걸어 모녀를 죽여버리겠다 협박했습니다.

사건 당일에도 오피스텔에서 A 씨의 딸을 만난 박학선은 휴대폰을 빼앗은 후 흉기를 수차례 휘둘러 살해했고 A 씨도 살해했습니다.

박학선은 공소사실에서 '살해하려는 마음을 먹었다'는 처음부터 부인합니다.
마음을 먹고 안 먹고, 그것이 계획성을 따지는데 가장 첫 단추이기 때문입니다.

박학선이 하는 이야기도 결국 '남편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길래 싸우다가 욱해서 살해한 거다' 하는 '우발적 살인' 주장입니다.
 

# '제정신 아니었다'→'욱했다'…'계획' 부인하는 '계획' 유행


흉악 범죄를 돌이켜 보면 범행 전에 술을 마셨다는 등의 심신미약 주장을 해 자주 공분을 샀습니다.

"이틀 동안 잠을 못 잤다" (2015 시화호 살인 김하일)
"열흘간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다" (2016년 수락산 등산객 살인 김학봉)

이런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매스컴에 나오는 흉악범들이 하나같이 입 모아 말합니다.

"싸우다가 욱했다"

실제로 변호사들도 "어차피 안 받아들여지는데 뭐하러 주장하냐" 합니다. 심지어는 "진짜 정신병 앓는 사람들도 주장 못 할 정도"라고 까지 말합니다.

형을 깎을 수 있는 '심신미약'을 건드릴 수 없으니 더 받지나 말자며 '계획성'을 피하겠다는 것입니다.
형사재판부에 있는 판사도 "생각해보니 요즘은 다 계획성 부인한다" 새삼 느낀다 합니다.
 

#국회법 개정으로 심신미약 감경 차단…'계획성'은 판례 없어


모두 막연하게 느낀 변화의 실마리를 찾아봤습니다.
 
강서구 PC방 직원 살해 김성수 관련 국민청원 캡처

강서구 PC방 직원 살해 김성수 관련 국민청원 캡처

2018년 강서구 PC방 직원을 살해한 김성수가 심신미약을 내세우자 심신미약 폐지 국민청원이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겼습니다.

국회는 곧바로 심신미약자 처벌 조항을 바꿨습니다
 
심신미약자는 형을 '감경한다' → '할 수 있다'

이 단어 몇 자가 바뀌는 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형사재판 판사들에게 직접 물어봤습니다.

'할 수 있다'는 반드시 감경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땐, 감경하지 않으면 2심, 3심에서 깨집니다. "1심 판사 입장에서 감경하지 않으면 어차피 2심, 3심에서 깨질 판결을 어떻게 내리냐" 합니다. '할 수 있다'로 '안 해도 되는' 여지가 생기면서 심신미약일지라도 감경하지 않아도 부담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후 '계획성' 다툼은 확 늘었지만, 언제부터 마음먹은 걸 계획으로 봐야 할 지, 어떤 의도와 행위를 계획으로 볼지 명확한 판례는 없습니다.

물론 이 기준들이 세워진다면 범죄자들은 또다시 이 틀에 맞춰 피해 나가는 전략을 짤 것입니다.

하지만 1심에서 '계획 살인'으로 사형이 선고된 권재찬이 2심에선 '우발살인'으로 달리 인정되며 '무기징역'이 된 것을 보면
이는 사형과 무기징역을 가를 만큼 중요한 요소입니다.

특히 끔찍하게 가족을 잃은 또 다른 가족에게 '계획성 다툼'을 지켜보는 건 또 다른 난도질입니다. 갖은 증거를 두고 '알아서 판단하는' 판사 앞에서 유족들은 초조해 해야 합니다. 결국 지금의 모호한 기준을 바꾸지 않으면 흉악범 판결마다 논란은 지속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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