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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영역] 경성크리처에 숨겨진 '진짜 괴물' 731부대 이시이 시로…천재 의사, 어떻게 악마가 됐을까

입력 2024-01-19 06:39 수정 2024-01-19 11:42

생체 해부 등 반인륜적 실험…기획·실행한 이시이 시로,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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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체 해부 등 반인륜적 실험…기획·실행한 이시이 시로, 누구?


"731부대, 진짜인가요?" 〈경성크리처〉 일본 내 2위


지난해 12월, 전 세계에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경성 크리처〉는 731부대를 소환했습니다. 곧바로 일본에서 혹평이 쏟아졌습니다. 노골적인 '반일(反日) 드라마'라는 거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난 5일 파트 2가 공개되자 〈경성 크리처〉는 이틀 만에 일본 넷플릭스 2위를 기록합니다. 일본 웹사이트 곳곳에 "731부대가 서울에 있었나요?" "731부대가 그렇게 나빴나요?"와 같은 질문도 올라왔죠. 그만큼 일본인에게도 불편하지만 알고 싶은 게 731부대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이번 〈인물탐구영역〉은 이시이 시로 731부대장 이야기를 다뤄봅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경성크리처'의 옹성병원 의사 이치로 원장(배우 현봉식).

넷플릭스 드라마 '경성크리처'의 옹성병원 의사 이치로 원장(배우 현봉식).



드라마가 다 담지 못한 비극

731부대의 단체 사진. 출처=아사히 신문.

731부대의 단체 사진. 출처=아사히 신문.


오늘 오후에는 또 다른 해부가 있었다. …(중략)…동료 대원 하나가 살균 소독을 하지 않은 주사 바늘을 사용하려고 했다.
"이봐, 뭐 하는 건가? 소독은 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자 동료 대원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렇게 빈정댔다.
"자네야 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우리는 이 녀석을 죽이려는 거야."
-겐 유아사의 회고록 중에서 (김창권, 〈제국주의 일본과 야만의 역사, 일본 관동군 731부대를 고발한다〉중)

731부대 하면 잔혹한 실험 내용이 떠오르시죠. 살아있는 사람 몸에 세균을 주사하고 병이 퍼지면 살아있는 채로 해부하고(세균 주사 실험), 영하 35도의 추운 겨울날 밖으로 끌고 가서 손과 발을 얼게 한 다음, 끓는 물에 넣어 피부를 벗겨내기도 합니다(동상 실험). 이 밖에도 기아 실험, 단수 실험, 진공 실험 등 반인륜적인 실험이 이뤄졌습니다.
731부대의 이시이 시로. 1932년 촬영.

731부대의 이시이 시로. 1932년 촬영.


처음부터 실험 대상자의 '사망'을 전제로 한 실험. 여기엔 특정 군의 뿐 아니라 일반 의사와 의학자도 참여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직업인 의사들이 사람을 마루타(통나무)로 불렀고, 연구 보고서에는 '원숭이'로 기재했습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집니다. 이걸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사람, 이시이 시로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엘리트 의사'의 비뚤어진 야욕


731부대의 이시이 시로. 학창시절의 모습.

731부대의 이시이 시로. 학창시절의 모습.

이시이 시로는 1892년 지바 현 농촌에서 지역 유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어릴 적부터 굉장히 명석했는데, 어렵고 두꺼운 책을 한 번만 봐도 이걸 다 외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의대에 들어가는 건 당시에 어려웠는지 세 번의 시도 끝에 1916년 교토제국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합니다. 그 후 육군 의과대학에 갔다가 1924년 다시 교토대학원에 파견됩니다. 당시로선 엘리트 코스였죠.

그런데 성격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런 일화가 전해지는데요.

"이시이는 매우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중략)…실험실 장비가 얼마 없었기 때문에 모두들 조심해서 나눠 써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시이는 모든 학생들이 떠나고 없는 밤에 와서 실험을 하곤 했죠. 학생들이 아주 오랫동안 공들여 씻은 실험 도구만 손대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죠. 다음날 더러워진 실험 도구를 본 학생들은 무척 화를 내곤 했지요.
-기무라 교수의 회상 (셸던 H. 헤리스, 〈일본인이 세운 죽음의 공장과 미국의 은폐〉 중)

동료나 후배에겐 무례했을뿐더러 '협박이 전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반면 윗사람한테는 매우 공손했다고 합니다. 특히 자신의 야망을 실현해 줄 수 있는 사람한테는 최선을 다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중 아라키 도라사부 학장(이후 교토대학 총장) 집에 자주 놀러 갔는데, 학장의 딸인 기요코에게 '반했다'며 청혼을 해 결혼에 성공하죠. 이 결혼은 이시이 시로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했는데요. 의학계에 별다른 기반이 없었던 이시이 시로에게 사회적 입지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시이 시로의 가족 사진. 우측 상단 첫번째가 이시이 시로. 우측 하단 첫번째는 아내 기요코로 추정된다.

이시이 시로의 가족 사진. 우측 상단 첫번째가 이시이 시로. 우측 하단 첫번째는 아내 기요코로 추정된다.


주변 사람들의 공통적인 평가는 '야망이 허무맹랑할 정도로 컸다'는 겁니다. 이시이 시로는 결혼을 하고 난 후에도 열다섯 미만의 어린 게이샤와 노는 걸 멈추지 않았는데, 술에 취하면 주로 "출세"와 연관된 주정을 했다 합니다. "군의관은 진급할 기회가 아주 적고, 진급해봐야 고작 소장이 전부다!"라는 식이었죠. 어떻게든 이름을 날리겠다는 의식이 아주 강했던 거로 보입니다.

'제네바 의정서'를 거꾸로 악용


1925년, 전쟁에서 생화학무기를 사용하지 말라는 제네바 의정서가 체결되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세균전은 위험하니 하면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을 텐데, 이시이 시로는 달랐습니다. '세균전이 그렇게 위협적이라면, 우리도 세균전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마침 일본은 제네바 의정서에 서명만 했고, 최종적으로 동의하진 않았던 터라 이시이 시로의 악랄한 주장이 현실에서 구현될 수 있었습니다.

731부대가 탄생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유럽 여행'입니다. 1928년부터 약 2년 동안 이시이 시로는 유럽과 미국을 시찰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를 이렇게 보고하죠. "일본 국방에는 결함이 있다. 국제적으로 금지된 세균전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미치광이 군의관', 만주로 가다

(좌) 1939년 정수기를 살펴보는 이시이 시로의 모습. 가운데. (우) 이시이 시로가 개발한 야전 정수기.

(좌) 1939년 정수기를 살펴보는 이시이 시로의 모습. 가운데. (우) 이시이 시로가 개발한 야전 정수기.


이시이 시로는 자신을 돋보일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야전 정수기를 개발했는데, 히로히토 일왕 앞에서 이걸 시연했죠. 오줌을 받아서 물로 만들었는데, 이걸 일왕에게 마실 걸 권유했다가 거절당하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 꿀꺽꿀꺽 마셨다고 합니다. 그 이후, 이시이 시로는 '미친 군의관'이란 별명을 얻었는데, 미쳤다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리곤 세균전 실험을 위해서 만주로 넘어갑니다. 왜 만주였을까요? 이시이 시로는 평소에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세균전 연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방어형 연구는 일본에서도 할 수 있지만, 공격형 연구는 해외에 나가서 해야 돼". 일본 자국민이 아니면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건데, 이런 생각은 731부대원에게도 만연했습니다.

"왜 만주에다 세균전 부대를 창설했는가?"
"만주에는 피 실험 재료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실험 재료란 생체 실험용으로 부대에 송부된 사람을 의미하는가?"
"그렇다. 그들은 마루타(통나무)라고 불렀고, 번호로 처리되었다"
-가외지마 군의소장의 증언 (김창권, 〈제국주의 일본과 야만의 역사, 일본 관동군 731부대를 고발한다〉중)

실외소독

실외소독

1936년, 만주 하얼빈에 방역급수부대가 설립됩니다. 이곳에서 이시이 시로의 비뚤어진 생각은 본격적으로 전쟁 범죄에 이르게 됩니다. 일본의 뛰어난 의사와 의학도들을 모았죠. '마루타'를 페스트균에 노출한 뒤 산 채로 해부를 해보기도 하고요. 벼룩에 페스트균을 심어 만주 민간인들에게 뿌려 마을을 초토화하는 등 세균을 사용한 실험과 공격을 자행했죠. 731부대 희생자 최소 3000여 명. 여기엔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시이 시로의 전후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도 2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다 1945년 8월, 일본 본토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죠. 일본 731부대가 있는 만주에도 소련군이 빠른 속도로 밀고 들어오자, 급해진 일본은 731부대의 모든 증거를 지구 상에서 지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마루타는 다 죽이고, 자료들도 태웠죠. 그리고 일본 히로히토 일왕은 항복합니다.


악마의 평온한 최후, 누가 죄인인가?

731부대의 이시이 시로. 전후 노년이 된 모습.

731부대의 이시이 시로. 전후 노년이 된 모습.


그리고 1959년 10월 9일 이시이 시로는 숨을 거두게 됩니다. 죗값을 치르지 않고 병상에서, 아주 편안하게 말이죠. 죽기 전 생각이 많았던 걸까요? 말년에는 승려들과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기독교에 입교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딸의 증언도 전해집니다. 전쟁 범죄자가 어떻게 평온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요?

여기엔 미국과의 딜이 있었습니다. 이시이 시로는 생체 실험 데이터를 미군에 넘겼고, 미군은 이 데이터를 독점하는 대신 이시이 시로 등 731부대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기로 한 것이죠. 소련은 이시이 시로를 처벌하려고 했지만, 이미 부대원들은 말을 맞춘 후였고 이시이 시로는 병상에 누워서 요리조리 발뺌했습니다. 이시이 시로를 심문하던 소련 검사 스미노프는 "이 세균 폭탄 새끼!" 라며 격분했다고 하죠.

반면 미국 육군 의학 연구시설의 연구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731부대의 데이터는) 귀중한 정보다.
이런 정보는 인체실험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우리 실험실에서는 얻을 수 없다.
이 데이터를 입수하기 위해 미국이 쓴 비용은 25만 엔이지만, 실제 연구를 하는 데 든 비용에 비하면 아주 소액이다."
-에드윈 힐(미군 측 조사자), (15년전쟁과 일본의 의학의료연구회 엮음,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

일본 정부도 731부대의 진실을 은폐하는데요. 731부대에는 일왕 칙령에 따라 연간 국비 1000만엔 정도를 썼고, 회계 검사원도 거치지 않았습니다. 즉, 731부대의 비밀이 공개되면, 그 비난의 화살이 히로히토 일왕을 향하게 되기 때문에 철저히 숨겨야 했죠.

양심 고백과 부정

하바롭스크 재판.

하바롭스크 재판.


"실은 아무것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나, 이야기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큰 부담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연구와 실험에 대해서 일본 군인 중 누군가는 꼭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가 박애를 위해 의술에 종사하는 한 명의 의사로서, 그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가라사와 도미오, 하바롭스크 재판 증언 중, (15년전쟁과 일본의 의학의료연구회 엮음,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

이런 상황에서 하바롭스크 재판에선 가라사와 대위가 양심 고백을 합니다. 가라사와는 '세균 생산 담당'이었는데, 731부대에서 하고, 보고, 들은 것에 대해 털어놓았습니다. 교정 노동수용소 금고 20년 판결을 받았으나 소일공동선언이 이루어지면서 특별 사면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라사와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유서 한장 남기지 않았기에 귀국을 포기한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전쟁 중 지은 끔찍한 죄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요? 아니면 '죽을 때까지 지키라'던 731부대의 비밀을 발설한 것에 대해 동료에게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였을까요?

반면,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731부대원들은 떵떵거리며 살았습니다. 이시이 시로의 오른팔 나이토 료이치는 일본 혈액은행(현 녹십자)을 설립하는데 동참합니다. 혈액은행은 한국전쟁에 혈액을 팔아 막대한 이득을 챙겼죠. 다른 이들도 대학교수, 연구소 소장을 하거나, 병원을 차려 사회적 지위를 누렸습니다.

731부대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아버지가 한 일이, 혹은 했다고 알려져 있는 일은 어떠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도 용서 받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알아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그때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정말 비정상적인 시대였다는 걸 말입니다."

-이시이 하루미 (이시이 시로 첫째 딸, 1982년 8월 29일 Japan Times)

이시이 하루미는 "아버지가 한 일이, 혹은 했다고 알려진 일이"라고 말합니다. 731부대의 실체가 일본에서 알려지기 시작하던 시점인데, 하루미는 아버지의 잘못을 온전히 인정하지는 않고 있죠.

미국 의사 프란츠 블라우 씨가 뉴욕타임스에 낸 편지. 2000년 12월 29일자. 20페이지.

미국 의사 프란츠 블라우 씨가 뉴욕타임스에 낸 편지. 2000년 12월 29일자. 20페이지.

"일본의 의사를 대표하는 일본의사회는 이번 기회에, 전쟁 중 적국 국민에게 가한 잔혹 행위를 공연히 비판함과 동시에, 실시된 것이 확실하거나 주지의 사실로 알려진, 환자에 대한 잔혹 행위에 규탄한다."

1949년, 일본의사회가 세계의사회에 가입할 때 작성한 성명입니다. 성명은 731부대의 비인도적 행위에 관해 처절한 반성이 아니라 지극히 애매한 인식과 견해를 표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전쟁이 끝나고 지금까지 731부대 만행에 대한 공식 발언은 이게 전부입니다. 1996년, 미국 의사 프란츠 블라우는 이 성명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 성명이 제대로 된 반성과 사과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일은 이미 끝난 문제"라며 묵살됩니다. 2002년과 2004년 거듭 문제를 제기했지만 계속해서 묻히고 말죠. 일본의사회의 반대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도 있었죠. 하지만 아마 그들의 아버지는 간첩이었을 겁니다.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날 수도 있겠죠. 전쟁에서는 이겨야 하니까요."
-익명의 731부대원, (1995년 3월 17일, Newyork Times)

뉴욕타임스 기자가 만난 731부대원은 당시 행위에 대해 정당화를 하려 했습니다. 해부하기 전에 왜 마취조차 해주지 않았냐 묻는 말에 "생체 해부는 정상적 상황에서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답하죠. 이를 설명하는 노인의 온화한 미소에, 우리가 731부대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다시 첫 질문입니다. 천재 의사는 어떻게 괴물이 되었을까. 역사학자 셸던 해리스는 "명성을 향한 이시이 시로의 조급함엔 의학 윤리가 자리 잡을 공간이 없었다"고 평합니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윤리와 도덕 따지지 않고 무엇이든 했던 이시이 시로에게 너무나 많은 권한이 주어졌고, 군국주의의 광풍까지 불면서 731부대라는 비극을 만들어냈다는 것이죠.

731부대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일본 의사들은 "최소한 이시이 시로만이라도 죗값을 치렀다면 일본 국민이 이토록 비참한 기분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않는 한 역사는 50년, 100년이 지나도 그를 끊임없이 심판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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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을 알면 맥락이 보입니다. 화제가 되는 인물의 스토리를 발굴해 매주 독자 여러분께 전해드립니다.


참고문헌

해리스, S. H. (1994). 일본인이 세운 죽음의 공장과 미국의 은폐. 북아띠.
김, 창권. (2014). 제국주의 일본과 야만의 역사-일본 관동군 731부대를 고발한다. 나눔사.
전쟁과의료윤리검증추진회. (2015). 731부대와 의사들. 건강미디어.
한민족문화교류협의회. (2019). 일본관동군 731부대 - 생체실험 증거자료집.
15년전쟁과 일본의 의학의료연구회, 하세가와 사오리, & 최규진. (2020).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 건강미디어협동조합.
교토보험의료신문. (2015, 8월 20일). 아오키 도미코의 전후 731부대와 의료윤리 강의 녹취록.
French, H. W. (2000, 12월 21일). Japanese Veteran Testifies in War Atrocity Lawsuit. New York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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