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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 사활] 속도내는 조희대…다시 개혁 앞에 선 사법부

입력 2024-01-08 17:23 수정 2024-01-08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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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은 이렇게 끝나겠지만, 그 부끄러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2012년 개봉한 '부러진 화살' 속 대사입니다.

당시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명대사로 꼽았습니다. 물론 더 기억에 남는 건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입니다.

실제 사건이 발생한 2007년엔 판사를 상대로 한 테러라며 온 나라가 들썩였습니다.

이후 나온 책과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법원에 날린 일침이라며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조희대 신임 대법원장이 지난해 12월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조희대 신임 대법원장이 지난해 12월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재판 안 열리자 당사자끼리 합의…칼 빼든 대법원장

그런데 최근 법원 주변에선 '재판이라도 받아봤으면'이란 말이 나옵니다. 소장을 접수하고 기일(재판 날짜)이 잡히지 않거나, 잡혀도 수개월 뒤에 잡혀 재판 진행이 너무 늦기 때문입니다.

(※ 일부 형사사건을 두고 재판 지연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는데, 형사재판은 형사 사법적 권리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만큼 획일적으로 평가하긴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불만을 여기저기 말할 수도 없습니다. 재판부 귀에 들어가면 불이익이라도 받지 않겠냐는 우려에섭니다.

접수된 지 1년이 넘도록 재판부의 연락이 없어 결국 당사자끼리 합의해 해결했다는 훈훈(?)하지만 씁쓸한 얘기까지 나옵니다.

지난해 12월11일 취임한 조희대 대법원장,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칼을 빼 들었습니다.

'재판지연 문제 해소, 법원장 후보 추천제 중단, 한국형 디스커버리 추진'
시무식에선 '① 신속하게 첫 기일을 지정한 뒤 ② 당사자와 함께 사건 처리 계획을 실천하고, ③ 기일의 공전을 방지하고 변론종결일부터 멀지 않게 판결 선고기일을 지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대법원장이 소장 접수 이후의 재판 진행에 대해 하나하나 언급하며 독촉한 건 매우 이례적입니다. 대법원장이 일선 판사들에게 직접 '재판 속도'를 강조한 셈입니다. 사활이 걸린 제도의 장단점을 떠나 추진 목적인 재판 지연 문제가 해소된다면 좋아할 이들이 많습니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국민 없는 성과 추진 사법불신 초래…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야

다만 경계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앞선 대법원장들의 모습입니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2011년 9월 27일 취임하며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소수자나 약자의 권리가 다수의 그늘에 묻혀 부당하게 침해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사법부에 주어진 또 하나의 중요한 사명이라고 밝혔습니다.

“재판의 독립이 없다면 이런 사명을 완수할 수 없고, 민주주의도 존속할 수 없다”고도 합니다. 국민과의 소통, 투명한 재판을 통해 사법부가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을 마치고 대법원을 나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을 마치고 대법원을 나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뒤를 이은 김명수 대법원장은 2017년 9월 26일 취임식에서 '올바른 재판이 무엇인지 고민해왔다'는 점을 자신의 최대 장점으로 꼽았습니다. “개혁과 변화를 이끌겠다”면서 “수직적이고 경직된 관료적 리더십 대신 경청과 소통, 합의에 기반을 둔 민주적, 수평적 리더십을 추구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대법원장의 권위를 내려놓고 국민과 사법부 구성원의 뜻을 존중하겠다”면서도 “사법부 독립과 법관의 독립 침해를 막겠다”는 다짐도 내놨습니다.

임기 6년을 모두 채운 두 대법원장들, 퇴임 때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임기 중 법원행정처 등에서 일어난 이른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아직도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유무죄를 떠나) 당시 상고법원 도입 추진과 함께 이뤄진 다양한 '사법행정권 행사'가 취임사에서 강조한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 보호, 국민과의 소통, 재판의 독립 등과 모순된 모습을 보여주고 떠났습니다.

법원을 위한 일이었음을 강조하며 오랜 시간 검찰과 다투고 있지만 법원의 독립성, 투명성, 그리고 정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크게 손상된 것이 사실입니다.

재판만 해온 경험을 강조하며 앞선 양승태 코트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던 김 전 대법원장은 임기 내내 각종 논란에 시달렸습니다. 김명수 코트의 방향성을 지지하는 판사들은 “개혁엔 저항이 있는게 당연하다”고 했지만 김 대법원장이 자초한 측면도 있습니다. 오랜 시간 유지된 제도를 대안 없이 폐지하고, 새로운 방식을 서둘러 도입하는 등 법원을 사법제도 실험실로 만들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좋은 제도를 도입해도 저항이 있는데, 완충지대 없이 폐지부터 하고보니 법원이 더 혼란스러워졌고, 장점보다 단점만 부각됐다는 시각입니다. 법원장 후보 추천제가 논란의 중심에서 표적이 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취임사에서 강조한 민주적 리더십과 소통, 그리고 효율적이고 신속한 재판을 통한 국민 신뢰 회복 등과 상충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두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는 다양한 제도를 연구하고, 실험해 추진했지만 결과는 사법 불신이 커지고 대법원장의 리더십에 대한 저항이 더 커졌습니다.

성향이 다르고, 그들에게 요구된 시대적 요구가 달랐음에도 두 대법원장이 각각의 임기를 끝내며 개혁의 대상이 된 건 왜일까요.

국민들이 바라는 건 하나입니다. '최후의 보루'라는 거창한 말보다 내 재판이 절차나 내용 면에서 공정해 보이고, 그런 과정을 통해 납득할 만한 판결을 받고, 그래서 법정 밖 본래의 자리로 빨리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법원은 그걸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지난 12년 법원이 '그들만의 리그'에 집중한 탓입니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3년5개월 남은 임기 … 속도와 성과에 설득을 얹어야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조희대 대법원장의 취임사, 외형적으론 앞선 두 대법원장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본권 수호, 법치주의 강조, 사법부의 과거 반성과 국민 신뢰 회복을 위한 노력입니다.

여기에 더해 연일 새로운 과제를 직접, 구체적으로 던지고 있습니다. 앞선 두 대법원장 시절에 대한 반성적 고려 때문인지 의욕이 충만하고 넘쳐 보입니다.

2020년 대법관에서 퇴임하고 3년간 로스쿨 석좌교수로 지내며 제3자가 됐던 시간이 도움이 됐을 겁니다.

문제는 조 대법원장의 임기가 3년6개월이란 겁니다. 대법원장의 정년을 70세로 정한 규정 때문에 앞선 두 대법원장에 비해 절반의 시간만 주어진 셈입니다. 벌써 한 달이 줄어 3년5개월이 남았습니다. 조 대법원장 입장에선 일각이 여삼추일 겁니다. 추진력이 좋고, 빠르게 셈해서 3년6개월을 6년 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할 겁니다.

그러나 여기엔 리스크가 있습니다. 제도 도입과 개혁이 너무 빠르면 체하고, 인재는 잘 쓰면 약이 되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대한민국은 지난 12년을 보내며 얻은 교훈이 있습니다. 속도와 성과보다 설득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국민을 설득하지 못하면 어떤 제도와 개혁도 비판의 칼날 위에 서게 됩니다. 법정에서 국민들이 나약해 보여도 권한을 준 건 그들이란 걸 잊을 때 법원은 다시 개혁 대상이 됩니다.

※ 도움말 주신 분들
이용훈 · 양승태 · 김명수 대법원장 시절 행정처와 법원 근무 경험이 있는 법조인들과 법원 근무 경험이 없는 개업 변호사들.

서초동 사활(死活)
서울 서초동에는 대법원과 각급 법원들, 검찰청, 그리고 수많은 변호사 사무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법조인의 절반 이상이 밥벌이를 하는 곳입니다. 시민들에게 멀지만 가까운 곳으로 이 곳의 변화가 대한민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서초동'이 법조계의 고유명사화 되었습니다.
사활(死活)은 바둑에서 돌의 삶과 죽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사활문제를 잘 풀어야 바둑 실력이 늡니다. 사법개혁 검찰개혁 등등 이곳에서 시민들은 잘 모르지만 벌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잘 모르지만 중요한 일들, 모두의 사활을 건 사건과 현상, 정책을 분석하고, 정리해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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