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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유해' 국민 추모행사…18일 현충원 안장

입력 2021-08-16 20:05 수정 2021-08-1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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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어제(15일) 고국 품에 돌아온,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오늘과 내일, 국민 추모행사가 열리고 모레, 정식으로 안장됩니다. 오늘만 1,400명 넘는 사람들이 분향소를 찾았는데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서 차에 탄 채로 분향소를 잠시 지나가는 드라이브 스루 방식으로 참배하기도 했습니다.

[이재민/대전 유성구 : 너무 감격스럽고요. 아들 4살인데 아들한테 장군님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나라를 항상 잊지 않는 대한민국 아들이 되라고 그런 마음을 갖고 오게 됐습니다.]

굴곡진, 우리 근현대사가 녹아있는 홍 장군의 삶을, 재조명해봤습니다.

이선화 기자입니다.

[기자]

[영화 '봉오동전투' (2019년) : 전국의 독립군 수는 알 수가 없어. 왜 그런 줄 아니? 어제 농사짓던 인물이 오늘은 독립군이 될 수 있다 이 말이야.]

처음엔 나와 내 가족들이 먹고살 땅을 찾기 위해 독립군이 된 이름 모를 영웅들.

101년 전, 홍범도 장군은 이들을 이끌고 중국 지린성 봉오동으로 향했습니다.

[영화 '봉오동전투' (2019년) : 나라 뺏긴 설움이 우리를 북받치게 만들고 잡아 일으켜서 괭이 던지고 소총 잡게 만들었다 이 말이야.]

천문과 지리를 활용한 치밀한 전략으로 일본군 157명을 사살했는데, 한국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 정규군과의 대규모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봉오동전투'입니다.

넉 달 뒤, 홍 장군은 김좌진 장군과 함께 보복에 나선 일본군 부대를 청산리에서 다시 물리치면서 자신감을 얻은 독립운동이 더 활발해지는 계기도 마련했습니다.

우리에겐 이렇게 '영웅'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생애를 들여다보면 희극과 비극이 뒤섞인 고려인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생계를 유지하려 '포수'들의 단체를 만들었고 전투에선 승승장구해왔지만, 독립운동이 힘들어지자 한인 집단농장의 지도자가 됐습니다.

1937년엔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낯선 땅 카자흐스탄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곳에선 고려인 극장의 경비를 서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음악극 '극장 앞 독립군' (2019년) : 여기에 있는 내가 나인지 잘 모르겠어. 그 세월이 이토록 짧은 것이었나.]

극장이 장소를 옮기자 정미소에서 일하다가 2년 뒤 찾아올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일흔다섯 나이로 세상을 떠난 홍 장군.

카자흐스탄 속 고려인들의 바람과 남북의 서로 다른 입장 속에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는 78년이 걸렸습니다.

(화면제공 : 월곡고려인문화관 결·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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