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현충일이었던 어제(6일)는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들어졌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반민특위를 친일 경찰이 습격한 지 70년이 된 날이기도 했습니다. 친일 관련 증거들은 그래서 없어졌고, 친일파 단 1명도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강희연 기자입니다.
[기자]
서울 을지로의 한 공사장입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70년 전에는 반민특위가 있었던 곳입니다.
이곳에는 당시 전국에서 보낸 친일 인사들에 대한 고발장과 또 각종 증거들 최소 수만 건이 모였습니다.
반민특위는 이 증거들을 토대로 친일파를 체포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70년 전 1949년 6월 6일, 친일 경찰 수십 명이 이곳을 습격했습니다.
오전 8시 당시 중부경찰서장 윤기병 등 경찰 50여 명이 사무실에 들이닥쳤습니다.
이틀 전,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가 친일행위로 반민특위에 체포된 것에 반발하면서입니다.
[김진원/제헌의원 김옥주(반민특위 발의) 아들 : (반민특위 요원이) 질질 끌려 청사 뒤뜰에 가 보니 이미 많은 요원들이 두들겨 맞고, 무릎이 꿇리어 앉혀져 있었다고 합니다.]
특위 사무실 내 총무과에는 친일 행적이 담긴 문서들이 쌓여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백재호 조사관은 "목포에서만 고발장 6000통이 왔다"고 했습니다.
경찰은 이 문서들을 모두 찢거나 불태웠습니다.
[김정륙/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의 아들 : 이게(문서) 없으면 반민특위는 사실상 기능을 잃고 마는 건데… 그러니까 애들(친일경찰)이 들어와서 이 흔적부터 없애버린 거예요.]
친일의 증거가 사라지면서 체포된 친일파들이 줄줄이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광복 후 이승만 정부에서 경찰 간부의 80%는 일제에 부역한 친일 경찰로 채워졌습니다.
경찰 조직을 장악한 친일 경찰들은 자신들을 향할지도 모를 칼날을 피하기 위해 반민특위 흔들기에 안간힘을 썼습니다.
서울에 이어 강원과, 충북 등 지역 조사부가 잇달아 공격받았고, 그 사이 반민특위 위원들은 모두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이강수/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6월 6일이 시작이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 다가 아니고…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국회 프락치 사건이나 백범 김구 암살 음모 사건 이런 거랑 연결되는…]
기습사건이 일어난 지 4달 만에 반민특위는 완전히 해체됐습니다.
(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백범김구기념관)
(영상디자인 : 김석훈·이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