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유생이 물과 불, 짐바리와 같은 물건을…들여오고…심부름하는 노비들이 들어오고, 술 파는 장사치까지 들어오니…마당이 뒤죽박죽이 안 될 이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 박제가 < 북학의 > 조선후기 실학자 박제가는 그렇게 한탄했습니다.
그가 묘사한 장소는 다름 아닌 과거시험장.
그곳은 딱 난장판과도 같았습니다.
실제로 여러 사람이 뒤엉켜 뒤죽박죽이 되었다는 의미의 난장판이란 말은 과거 시험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과거장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
나도 이제 다른 길을 연구하리라 결심하였다"
- 백범일지백범 김구 선생조차, 구한말 과거시험을 보러갔다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그 진풍경을 본 이후에 시험을 그만두고 동학에 참여했다 하니, 그 진상이 오죽했을까…
물론 규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까운 일가친척이 한곳에서 시험을 보지 못하도록 하였고 부정행위가 적발되면 곤장이 100대.
강제노역이나 귀양까지 보냈다는데…
그러나 제도는 그저 허울뿐이었을까…
작성된 답지를 대신 써주는 서수, 몸싸움을 통해서 시험장에서 좋은 자리를 잡아주는 선접꾼, 모범 답안을 대신 작성해주는 거벽이라는 전문 대리시험꾼까지.
그러니까 과거시험은 공정의 탈을 쓴 지극히 불공정한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100년이 훨씬 더 지났지만 과거시험을 대학시험으로 환치시켜 생각해본다면…
성적으로 긴 줄을 세우고 대학시험이 인생의 전반을 지배하는 사회.
그리하여 꼼짝없이 10대의 대부분을 시험이라는 담장 안에 갇혀 살아야 하는 미안한 입시감옥.
당장 뾰족한 묘수가 없다면, 적어도 시험만은 공정하게 누구도 억울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소한의 원칙일 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