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오늘 5월 18일,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난지 38년이 되는 날입니다. 5·18 특별법도 통과가 됐고, 당시 밝혀지지 않은 진상이 규명될 것이라는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에서 맞은 올해 5·18입니다. 발포 명령자 문제, 그리고 또 하나 행방불명자 문제가 그렇습니다. 실종된 시민이 242명이지만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건 이 가운데 82명입니다.
긴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행방불명자 가족들을 김민관 기자가 만나봤습니다.
[기자]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평범했던 시민들의 삶은 하나 둘 지워졌습니다.
아버지는 그날도 기름을 사러 나갔습니다.
[정호화/행방불명 정기영 씨 아들 : 나가서 항상 버스 타는 데서 손 흔들어 줬어요. 신작로에서… 그런데 그날은 못 나오게 하더라고요. 나오지 말라고.]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찾아 직접 거리로 나섰습니다.
[최정자/행방불명 정기영 씨 아내 : 다 다녔죠. 도청에도 가보고, 상무병원도 가보고 안 가본 곳이 없어요. 죽은 사람 태극기에 덮어놨잖아요. 태극기 떠들면 아니고, 아니고, 그런 거예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당시 호기심에 거리로 나선 아홉 살배기 막냇동생은 아직도 행방을 모릅니다.
[남진현/행방불명 남현규 씨 형 : 도청 앞이 시끄럽고 사람들이 전부 도청 앞으로 가고 하니까 따라간 것 같아요.]
동생이 총에 맞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지만 아직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남진현/행방불명 남현규씨 형 : 도청 앞 상황일지를 보니까 그때 발포를 했더라고요. (막냇동생이 나간) 그 시간하고 맞아떨어지더라고요.]
남겨진 이들의 삶은 참혹했습니다.
[최정자/행방불명 정기영 씨 아내 : 애들 굶겨 안 죽이려고 아픈 몸으로 일도 하고 그랬죠…그런 심정을 누가 알겠어요. 말도 못해요. 그 생활…]
그렇게 242명의 시민들이 광주에서 사라졌지만 정부는 82명 만 행방불명자로 인정했습니다.
가족이 직접 '증거'를 제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이 바라는 것은 크지 않습니다.
[정호화/행방불명 정기영 씨 아들 : 한 풀어가지고 5·18 공원으로 초대받고 (어머니가) 자리에도 계셔보고 싶고… 더 이상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어머니 한이라도 풀어드리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