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 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아티클 바로가기 프로그램 목록 바로가기

[르포+] "선물 받을 사람을 기다립니다"…학교 앞 서점에선 무슨 일이?

입력 2024-03-16 10:15 수정 2024-03-16 22:27
크게 작게 프린트 메일
URL 줄이기 페이스북 X

서울 마포구 염리동 한 서점에 붙은 특별한 공지문. 〈사진=김휘란 기자〉

서울 마포구 염리동 한 서점에 붙은 특별한 공지문. 〈사진=김휘란 기자〉


"가장 긴장되고 은근히 상처받기 쉬운 3월, 누군가가 여러분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남긴 책을 선물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한 서점에 시선이 머무는 공지문이 붙었습니다. 정갈한 주황색 종이에 빼곡히 적힌 글, "특별한 책들이 선물 받을 사람을 기다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다음과 같습니다. 올해 처음 서점을 방문하는 동도중학교 학생 1명, 서울여자중학교 또는 서울여자고등학교 학생 1명, 그외 학교 안팎의 청소년 손님 2명.
 
수령 방식은 "선물을 찾으러 왔습니다"라고 말하기. 〈사진=김휘란 기자〉

수령 방식은 "선물을 찾으러 왔습니다"라고 말하기. 〈사진=김휘란 기자〉


위에 언급된 세 학교는 서점과 건널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요. 서점 안 창가에서 고개를 들면, 완만한 경사로와 함께 동도중학교의 회갈색 벽면이 보입니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 봄날, '행운의 주인공'을 찾고 있는 이곳을 직접 찾아가 봤습니다.
 

익명의 타인에게…"당신을 낯설어하지만 위하는 사람으로부터"


탐독을 기다리는 네 권의 책은 총 세 명의 손님이 남기고 간 선물이었습니다. 학교별로 베일에 싸인 다른 책이 지정돼 있었는데요.

먼저 두 권은 지난달 동도중학교에서 고전부 활동을 마치고 졸업한 학생 1명과 그 가족이 "올해 처음 서점을 방문하는 동도중, 서울여중·여고 학생에게 한 권씩 선물로 전해달라"며 남기고 간 것이었습니다.
 
서점 안에서 보이는 학교 풍경. 〈사진=김휘란 기자〉

서점 안에서 보이는 학교 풍경. 〈사진=김휘란 기자〉


서점지기 황모 씨는 "전직 고전부 부장의 정신과 안목이 담긴 책이 특히 흥미롭다"며 "부원 친구들과 종종 서점에 들르곤 했는데, 지난해에는 고전부가 직접 출간한 책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나머지 두 권은 절기 '경칩'에 서점을 찾은 어느 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2024년 3월 5일, 개구리가 다시 세상에 나오는 날 그리고 내 조카가 새로 세상에 나타난 날, 당신을 위해 이 책을 선물합니다. - 당신을 낯설어하지만 위하는 사람으로부터"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는 한 사람" 〈사진=서점 SNS〉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는 한 사람" 〈사진=서점 SNS〉


긴 편지와 행운의 메시지가 담긴 이 책들은 위 세 학교가 아닌 학교 안팎의 청소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황씨는 "그동안 네 권의 책 중 한 권이 주인을 찾아갔는데, 책을 선물로 받아 간 분이 또다시 한 권을 선물로 남겨 여전히 네 권이 남아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나이도, 서로에 대해 도무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 글과 마음만으로 시공간을 뛰어넘는 연대를 이어가는 모습이었지요.
 

"느리고, 귀찮고, 번거롭지만…" 10대 작가들이 말하는 '책'


노란빛 온기가 가득했던 이곳에선 특히 '미래의 청소년 독자'를 위해 고른 책과 함께 직접 쓴 문집을 남기고 간 동도중 고전부의 흔적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2023. 4. 고전부, 활동을 시작하다'
'2023. 7. 고전부, 기말고사를 망쳐 시험점수 내기가 취소되다'
'2023. 12. 고전부, 문집을 제작하다'
'2024. 2. 고전부, 부원 전원 졸업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다'
 
고전부의 짧고 굵은 역사. 〈사진='읽기 전에' 중〉

고전부의 짧고 굵은 역사. 〈사진='읽기 전에' 중〉


총 9명이 활동한 고전부는 졸업 전 자신들이 썼던 글을 엮어 자비로 문집을 출간했고, 단골이었던 이곳 서점과의 인연으로 소량의 판매에도 성공했습니다.

다음은 필명 '범인', '가지'를 사용하는 공동부장들과의 일문일답.

Q. 고전부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가지〉 고등학생이 되면 마음대로 놀지도 못할 텐데, 중학교 3학년 마지막 한 해 뭐라도 남기자! 라는 마음으로 범인과 만들게 됐습니다. 부원들을 영입할 때는 체스도 두고 게임도 할 거라고, 이름만 고전부라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독서와 글쓰기를 주력으로 하게 됐어요. 부원이 너무 많으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책 좋아한다는 친구들을 주변에서 알음알음 모았는데, 모으고 보니 딱 9명이더라고요. 구인회를 노리고 제한한 인원수였는데 서점 손님들께서 알아주셔서 기뻤습니다.

Q. 주로 어디서 모여, 어떤 식으로 활동했나요?
범인〉 동아리방은 방과 후 빈 교실을 배정받았습니다. 모임은 정기적이지 않았고, 모임이 잡히면 원하는 부원들만 참석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모여서는 주로 시간제한이 있는 짧은 글쓰기를 하거나 서로 쓴 글을 읽어보는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이렇게 모여서 하는 활동도 있었지만, 모이지 않고 진행하는 활동도 있었습니다. 모이지 않고 한 활동은 달마다(매달 하진 못 했지만) 주제를 정해서 각자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글의 주제는 고전과 관련된 것부터 약간 장난스러운 것까지 다양했습니다.
 
15분 동안의 글쓰기. 〈사진='읽기 전에' 중〉

15분 동안의 글쓰기. 〈사진='읽기 전에' 중〉


Q. 1년간의 고전부 활동을 글로 엮은 문집을 냈습니다. 어떤 책인가요?
범인〉 『읽기 전에』는 고전부에서 쓴 글들을 엮은 얇은 책입니다. 부원들이 모여 함께 진행했던 활동의 결과물, 각자 주제에 맞춰 집에서 썼던 글들 그리고 활동과 관련 없이 부원들이 추가적으로 썼던 글들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가지〉 중학교 3학년을 마무리 짓는 마침표 같은 책이면서 부원들과의 앞으로를 연결하는 쉼표 같은 책입니다. 이름을 고전부로 지었으면 문집 하나 정도는 꼭 내야 한다는 범인의 강력한 주장 때문에 제작하게 됐어요. 원래는 마포구에서 동아리 활동 예산을 따내 만들고 싶었는데, 서류단계에서 탈락하고 결국 부원들끼리 돈을 모아 만들었습니다.

Q. 이곳 서점의 단골손님들이었다고 들었는데요. 이곳은 어떤 공간이었나요?
범인〉 저희가 중학교 1학년일 때 생긴 서점인데요. 공동부장인 저와 가지가 자주 드나들었고(솔직히 민폐도 좀 끼쳤던 것 같습니다), 여러 좋은 책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 덕분에 저희가 학년이 올라가도 책 읽기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즐길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또 고전부의 몇몇 활동 아이디어는 이곳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예컨대 15분의 짧은 시간 동안 글을 쓰는 활동은 서점의 백일장에서 얻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무엇보다 저희의 책이 많은 분께 읽히게 된 이유도 이곳에 있어요. 자기만족용으로 만들었던 문집이 타인에게 전해지고 읽히는 경험은 아마 학창 시절에 다시없을 소중한 추억이 되겠죠.
 
문집 출간을 위한 부장님들의 치열한 고민. 〈사진='가지' 제공〉

문집 출간을 위한 부장님들의 치열한 고민. 〈사진='가지' 제공〉


Q. '미래의 청소년 독자'를 위해 책 나눔을 해 눈길을 끕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범인〉 제가 책 나눔을 한 이유는 같은 경험을 또 다른 청소년이 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적은 금액으로 누군가에게 선물 같은 경험이 되고, 책을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도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다른 이유로는, 제가 좋아하는 책을 다른 학생이 읽어 봤으면 좋겠다는 사심도 있었습니다.

Q. 이른바 '도파민 중독' 시대에 책을(고전을) 읽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범인〉 요즘은 쉽고 빠르고 단순한 미디어를 선호하는 시대입니다. 10분짜리 유튜브 영상보단 쇼츠가 선호되고, 웹툰이나 웹소설도 예전보다 파악하기 쉽고 정형화된 플롯이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미디어가 단순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꺼운 소설책이나 고전은 이런 호흡이 짧은 미디어의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깐잠깐 2~3분 읽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5시간 동안 읽은 책이 결국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아직 사람들이 책을 읽는 이유는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독후감 대신 '독선감'. 〈사진='읽기 전에' 중〉

독후감 대신 '독선감'. 〈사진='읽기 전에' 중〉


책을 읽는 것에 어떤 큰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는 게 인터넷을 거부한다거나 시대의 흐름에 반기를 드는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도 다른 부원들도 인터넷을 꽤 많이 합니다. 단지 책을 읽는 것은, 스크린에서 얻을 수 없는 종류의 즐거움을 잊지 않고 놓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지 음. 고전부 부원 상당수도 도파민 중독으로 고생하고 있는데요…저는 독서가 패스트푸드 범람 시대의 슬로푸드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도파민 중독을 거론할 때마다 나오는 쇼츠들은 쉽고, 빠르고, 자극적이지만 쉽게 지치고 그만큼 금방 휘발되잖아요. 탈이 나기 쉽기도 하고!

반면 독서는 꽤 느리고, 귀찮고, 번거롭습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이니 쇼츠가 하나의 문화생활처럼 자리 잡은 거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운데…궁금하신 분들은 이참에 독서를 시작해 보시길 권장 드립니다!
 
서점 한 공간에 마련된 문집 전시 공간. 〈사진=김휘란 기자〉

서점 한 공간에 마련된 문집 전시 공간. 〈사진=김휘란 기자〉

 

"책 대신할 유혹 너무나 많지만…생각하는 힘 길러야"


동도중 고전부는 지난해 4월부터 지난달까지 약 10개월간의 활동을 마치고 이제는 흩어져 각자의 길을 가게 됐습니다.

이들의 활동을 지켜봤던 동도중 이용도 국어 선생님은 "누군가가 보기엔 어쩌면 의미 없는 이 글들을 굳이 출판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짧은 글 속에 숨겨진 웃음과 번득임은 충분히 출판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소감을 밝혔습니다.
 
얼굴 모양 돌 vs 돌 모양 얼굴. 〈사진='읽기 전에' 중〉

얼굴 모양 돌 vs 돌 모양 얼굴. 〈사진='읽기 전에' 중〉


"국어 교사의 입장에서 요즘 학생들은 너무 책을 읽지 않습니다. 책을 집중해서 읽을 시간도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그런 시간이 있다고 해도 책을 대신해서 할 수 있는 유혹들이 너무나 많아요. 특히 남녀 학생 공통으로 얘기하자면 휴대전화겠죠. 사실상 요즘은 학생들을 조용하게 만들고 싶고, 뭐라도 하게 만들려면 휴대전화를 쥐여주고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뿌려주면 됩니다.

그런데 이런 환경 속에서 자극을 받아들이는 데에만 익숙한 학생들이 점점 사고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생활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은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인데, 이를 기를 시간에 시각과 청각에 의존한 자극들만 받고 있으니 정작 무언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거나 고민이 필요할 때는 그저 어른들의 얘기만 들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렇기에 스스로 충분히 사고할 수 있는 시간이 학생들에겐 필요하고, 이런 생각의 힘을 길러주는 것이 바로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광고

JTBC 핫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