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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영역] 오디션 물먹고 칼 간 스티븐 연…'한국계 최초 골든글로브' 기록 뒤 이런 장면이

입력 2024-01-12 07:05 수정 2024-01-12 10:14

'워킹데드'의 피자배달부가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 받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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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데드'의 피자배달부가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 받기까지




 

아시아계 배우가 남우주연상을?

지난 8일(현지시각 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베버리힐스의 힐튼 호텔,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로 TV 드라마 부문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스티븐 연. 〈출처=Golden Globes〉

지난 8일(현지시각 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베버리힐스의 힐튼 호텔,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로 TV 드라마 부문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스티븐 연. 〈출처=Golden Globes〉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들 앞에서 배우 스티븐 연이 호명됐습니다. 지난 8일(현지시각 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베벌리 힐스의 힐튼 호텔,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로 TV 드라마 부문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겁니다. 스티븐 연은 떨리는 표정으로 수상 소감을 말했고, 동료 배우들은 존중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한국계 최초 남우주연상'이라는 소식이 우리나라에도 타전되었죠.

골든글로브는 80년 동안 명맥을 이어온 최고 권위 시상식이지만, 비교적 최근까지 아시아계 배우에게 높은 벽이었습니다. 얼마나 그 벽이 견고했는지는 숫자가 말해줍니다. 1944년부터 지금까지 골든글로브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을 받은 아시아계 배우는 딱 두 명입니다.
 
80년 역사의 골든글로브에서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을 받은 아시아계 배우. 왼쪽 대런 크리스(2019), 오른쪽 스티븐 연(2024).

80년 역사의 골든글로브에서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을 받은 아시아계 배우. 왼쪽 대런 크리스(2019), 오른쪽 스티븐 연(2024).

2019년 필리핀계 혼혈인 대런 크리스가 드라마 '글리'로 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수상자가 스티븐 연입니다. 미국 영화·드라마계에 만연한 화이트 워싱(백인 캐릭터가 아닌데도 백인 배우를 캐스팅함) 현상 때문에 아시아계 배우가 맡을 배역이 많지 않았을뿐더러, 주인공을 맡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었기 때문이죠. 그런 측면에서 이번 스티븐 연의 남우주연상 수상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번 주는 골든글로브의 높은 장벽을 넘은 스티븐 연에 대해 탐구해보겠습니다.

 

미국을 사로잡은 피자 배달부

드라마 〈워킹데드〉에 글렌 역으로 출연한 스티븐 연.

드라마 〈워킹데드〉에 글렌 역으로 출연한 스티븐 연.


스티븐 연이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건 2010년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워킹데드〉를 통해서였는데요. 등장부터 강렬했습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좀비들 때문에 릭이 위험에 빠졌는데, 그때 전화가 울리죠. 수화기 너머의 인물이 바로 스티븐 연이 맡은 배역 글렌입니다. 피자 배달부 글렌은 특유의 재빠름과 재기발랄함으로 릭을 구해내죠.

모두가 좀비로 변하는 아포칼립스가 펼쳐져도 글렌만큼은 생기를 잃지 않는 캐릭터였습니다. 오히려 시즌을 거듭할수록 더 강해졌죠. 극중 시골 수의사의 딸 매기와 사랑을 키워나가면서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글렌은 영웅이자 섹스 심벌"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주연급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러다 글렌은 시즌 7에서 야구 방망이에 맞아 죽게 됩니다. 죽음의 방식이 너무 잔인해서 인지, 드라마 팬들이 엄청나게 반발했고요. 제작진은 왜 이 시점에 글렌이 죽어야 했는지 진땀 빼며 설명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일부 팬들은 다시는 드라마를 보지 않겠다 말했다"고 현지 언론은 전하기도 했습니다. 좀비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고, 긴장감이 떨어진 데다 인기 캐릭터 글렌마저 하차하면서 시즌 7 이후 〈워킹데드〉의 시청률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꼽은 매력은?


도대체 스티븐 연의 매력이 뭘까? 궁금한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영화 〈옥자(2017)〉에서 스티븐 연과 함께한 바 있는 봉준호 감독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남자죠, 〈옥자〉에서.
거짓말을 하지만 또 미워할 수 없는 묘한 귀여움이, 스티븐 연 특유의 사랑스러움이 있는 것 같아요."
-봉준호 감독 ,2020년 12월 'Variety'

〈옥자〉에서 동물권 단체 멤버 케이는 미자의 말을 통역하는 과정에서 거짓말을 합니다. 동물권을 지킨다는 대의 때문이었습니다. 거짓말이 들통나자 동료에게 얻어맞고 쫓겨나지만, 그래도 이 남자의 거짓말 때문에 옥자의 여정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스티븐 연의 사랑스러운 매력이 없었다면 영화 〈옥자〉의 전개가 설득력을 잃었을 겁니다.

 

담금질의 시간

 
스티븐 연이 20대 초반 찍은 '데이트 옥션' 설정의 코미디 영상. 스티븐 연은 영상에서 자신을 스물 셋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출처=유튜브 brownieprhaim〉

스티븐 연이 20대 초반 찍은 '데이트 옥션' 설정의 코미디 영상. 스티븐 연은 영상에서 자신을 스물 셋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출처=유튜브 brownieprhaim〉

스티븐 연의 연기 입문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미국 미시간 주 칼라마주 대학에 심리학 전공으로 입학한 스티븐 연은 코미디 연기 그룹인 '몽카펄트'의 공연을 보고 반합니다. 그룹에 들어가 연기를 배워보려고 했지만, 처음에는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더 필요할까' 고민해 다시 오디션을 보았고, 마침내 고정 멤버가 되어 연기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내가 스티븐 연에게서 느낀 한 가지는, 배우고자 하는 열의였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배우고 비약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저는 그가 매년, 매 분기 성장하는 걸 보았습니다."
-시우란 탄 칼라마주대학 교수, 2021년 4월 'WXYZ DETROIT'
 
연기 공연 그룹 '세컨드시티' 활동 당시 사진. 좌측에서 네 번째가 스티븐 연. 〈화면 출처=세컨드 시티 홈페이지〉

연기 공연 그룹 '세컨드시티' 활동 당시 사진. 좌측에서 네 번째가 스티븐 연. 〈화면 출처=세컨드 시티 홈페이지〉


이후 같은 대학 친구이자 동료와 함께 시카고로 가 4년 동안 '세컨드시티'라는 그룹에서 자신을 갈고닦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LA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할리우드에서 5개월 동안 수없이 많은 오디션을 봤다고 합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끝에 만난 작품이 〈워킹데드〉였던 겁니다.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

 
어릴 적 스티븐 연의 모습. 〈화면 출처=스티븐 연 엑스(구 트위터)〉

어릴 적 스티븐 연의 모습. 〈화면 출처=스티븐 연 엑스(구 트위터)〉

스티븐 연은 4살 때 미국에 이민을 왔습니다. 건설업에 종사하는 아버지가 이주를 결정했고, 미국에 정착한 뒤 부모님은 화장품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스타'가 되고 난 뒤에도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계속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 인터뷰에서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느낌"의 외로움에 관해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이런 '정체성 위기'를 겪는다고 하는데요. 눈에 띄는 동양적 외모 때문에 백인 무리에 끼지 못하고, 한국말이 유창하지 않기 때문에 온전히 한국인도 아닌 고립감. 한평생 미국에 살았는데도 "넌 어디서 왔니?"라는 질문을 받기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영원한 이방인'이라 느낀다고 합니다.

스티븐 연도 다르지 않았는데요. 2017년 JTBC 예능 〈비정상회담〉에 나와 '아시아계 미국인' 배우로서 겪은 고충도 털어놓은 바 있죠. 한 영화에 주인공으로 뽑혔는데 조명 감독들이 아시아인에게 맞는 조명을 쏘지 못해 배우 중 가장 못나게 나왔던 경험을 털어놓았습니다.
스티븐 연

스티븐 연


그러다 영화 〈미나리〉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글을 읽고 눈물을 왈칵 쏟았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맡았던 '제이콥'은 아칸소로 이주한 이민자 1세 역할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가족의 경험과 맞닿아있는 역할을 연기하면서 스티븐 연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릅니다. (남우주연상은 '더 파더'의 앤서니 홉킨스에게 돌아갔습니다)

"저희 가족은 먼저 캐나다에 갔다가 미시간에 정착했습니다.
서부의 한적한 시골에서도 살았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영화의 경험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민해서 사는 삶이라는 것이 세대 간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자라면서 알았어요, 문화나 언어나 여러 차이로 인한… 많이 공감했습니다."
-스티븐 연, 2021년 2월 부산국제영화제 기자회견
드라마 '성난 사람들'에서 한국계 미국인 '대니'를 연기한 스티븐 연. 〈출처=스티븐 연〉

드라마 '성난 사람들'에서 한국계 미국인 '대니'를 연기한 스티븐 연. 〈출처=스티븐 연〉


그리고 드디어 〈성난 사람들〉이란 작품이 찾아옵니다. 한국계 이민자라는 설정은 영화〈미나리〉와 같지만, 캐릭터는 완전히 달라요.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화가 나 있는 한인 2세 역할인데요. 그동안 스티븐 연이 주로 맡았던 캐릭터는 '근면하고, 바르고, 함께 있으면 도움이 되는 모범 소수자', 서양인의 관점에서 본 전형적인 아시아인 모습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모범 소수자 신화'에서 완전히 탈피한 거죠. 돈 없고, 미래도 없고, 인성도 바닥난 인물을 그려냈습니다.

 

<겨울왕국>이 소환된 이유?


"너무 이상한데요. 제가 보통 자신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 고립분리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런데 막상 이 자리에 오니 다른 사람들부터 떠올리게 되네요. 마치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줄거리처럼 느껴집니다."
-스티븐 연, 2024년 1월 골든글로브 수상 소감

골든글로브를 받은 스티븐 연은 갑자기 '겨울왕국'을 소환했습니다. 〈겨울왕국〉 줄거리 혹시 기억나세요? 엘사는 손대는 모든 걸 다 얼려버려서, 스스로 성에 자신을 고립시킵니다. 그럼에도 동생 안나의 사랑과 노력으로 다시 사회에 속하게 되죠. 스티븐 연도 '한국계 미국인' 배우로서 외롭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가족과 주변인들의 사랑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성장한 것도 있겠죠. 스티븐 연은 영화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었는데요. 이유를 기자가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이해하는 한국인은 우리가 보는 한국인과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달라요.
그래서 우리의 진실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영화 제작의 모든 과정에 참여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스티븐 연, 2021년 2월 부산국제영화제 기자회견


아리송하게 느껴졌던 수상 소감, 삶의 궤적, 그의 인터뷰를 종합해보니 스티븐 연이 걸어온 길은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보여주기 위한 일련의 과정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료 배우들의 박수에는 스티븐 연이 걸어온 길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었겠죠. 성공한 배우와 제작자로서 목소리를 내며 아시안에 대한 편견을 조금씩 허물어 온 스티븐 연. 그의 행보를 앞으로도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인물탐구영역
 
[인물탐구영역] 오디션 물먹고 칼 간 스티븐 연…'한국계 최초 골든글로브' 기록 뒤 이런 장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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