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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찰만 받으면 꼼수도 OK?...'타짜'가 된 한국생산성본부

입력 2023-12-28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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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선/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위원 (지난 10월) : 중기부가 중기유통센터에 예산 교부를 하고 유통센터에서는 수행기관 선정해서 진행하는데 이렇게 진행하면서 다 수행을 못 하니까 재하청, 재재하청 이렇게 자꾸 하청이 지금 내려간 것 같고요.]

지난 10월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나온 지적 사항입니다. 중소벤처기업부 산하의 공공기관인 중소기업유통센터가 발주한 사업과 관련한 내용인데요. 이인선 의원은 사업을 수주한 기관이 해당 용역을 다른 업체에 재하청하는 행태를 꼬집었습니다. 낙찰자가 아니라 재하청 업체가 실질적으로 사업을 수행하게 되면 결과물의 질이 떨어진다는 취지의 비판이었는데요.

도마에 오른 건 지난 2021년 중소기업유통센터가 공모한 '소상공인 상품화 컨설팅 지원 사업 운영대행 용역'이었습니다. 소상공인들의 상품이 온라인에서 원활하게 판매될 수 있도록 컨설팅을 제공하고 홍보를 지원해주는 사업인데요. 사업비는 16억여 원 규모였습니다. 수주 경쟁에는 모두 3곳이 뛰어들었습니다. 이 중에는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의 공직유관단체도 있었는데요. 교육과 컨설팅 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한국생산성본부(KPC)란 곳입니다.

당시 생산성본부는 방송제작전문업체 등 중소기업 두 곳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해 입찰에 참여해 최종 사업자로 선정됐습니다. 배점이 80점에 달하는 기술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기 때문인데요. 기술평가는 기관의 신용도와 사업 수행 실적, 운영 전문성 등을 주로 살펴봅니다. 한국생산성본부는 경쟁업체 가운데서도 규모가 큰 편이었는데요. 공직유관단체로서 브랜드 파워와 인지도 역시 사업 수주에 한몫했습니다. 생산성본부라는 간판 자체가 일단 경쟁력을 보증해준 셈입니다. 겉으로는 별문제가 없어 보이는 수주 과정이지만 속은 달랐습니다.

#'묘수' 아닌 '꼼수'
한국생산성본부가 최초 입찰 시 발주처인 중소기업유통센터에 약속한 자체 사업수행 비율은 80%였습니다. 생산성본부가 전체 업무의 80%를 맡고 함께 참여한 중소기업 두 곳에 10%씩 배정하겠다는 의미인데요. 기술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던 것도 생산성본부의 기여도를 가장 높게 책정한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낙찰을 위한 눈속임일 뿐이었습니다. 실제 사업을 수행할 때는 정반대였는데요. 생산성본부가 20%, 나머지 두 개 업체가 80%를 맡은 겁니다.
한국생산성본부 내부 기안문

한국생산성본부 내부 기안문


생산성본부의 내부 문건을 살펴보면 처음부터 조직적으로 계획된 시나리오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생산성본부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요. 담당 부서가 기안한 문건에는 “입찰 시 높은 기술 점수 확보를 위해 8:1:1을 제안했지만 실제 용역비 집행 비율은 20:52:28로 진행하겠다”고 나와 있습니다. 해당 문건은 안완기 회장의 최종 결재까지 거쳤는데요. 애초 생산성본부는 얼굴마담 역할만 하고 나머지 두 업체에 하도급을 줄 심산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죠.

한국생산성본부 내부자 역시 “한국생산성본부는 실제로 사업을 수행한 게 거의 없고 공동 참여업체에서 진단보고서와 사업계획서 등 일체를 담당했다”고 폭로했습니다. 특히 컨설팅을 받은 개별 소상공인에 대한 진단보고서 작성은 원래 생산성본부가 맡기로 한 일이었지만 이마저도 영상 제작을 주로 하는 중소기업이 떠안았는데요.

만일 입찰 단계부터 중소기업유통센터에 실제 사업수행비율을 솔직하게 밝혔다면 과연 사업자로 선정될 수 있었을까요? 생산성본부는 이런 눈속임을 낙찰을 위한 '묘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린 이런 걸 '꼼수'라고 부릅니다.

#'타짜'와 '호구'
'타짜' 같은 꼼수는 한동안 먹혔습니다. 생산성본부는 지난 2020년부터 2023년까지 내리 4년 동안 같은 방식으로 중소기업유통센터가 발주한 비슷한 사업을 따냈는데요. 사업 규모만 69억 9,700만 원에 달합니다. 중소기업유통센터로선 '호구'가 된 꼴이었는데요.

하지만 타짜도 실수할 때가 있는 걸까요? 대놓고 기술을 구사하다가 중소기업유통센터에 덜미가 잡힌 건데요. 올해 3월, 생산성본부는 경쟁업체 4곳을 따돌리고 또다시 '소상공인 상품 개선 컨설팅(온라인 홍보·KC인증 등) 지원사업 운영대행'의 최종 사업자로 선정됐습니다.

중소기업유통센터 나라장터 사업 공고

중소기업유통센터 나라장터 사업 공고


생산성본부는 약 한 달 뒤 나라장터에 똑같은 내용의 사업 공고를 냅니다. 공고명은 '소상공인 상품 개선 컨설팅(온라인 홍보·KC인증) 위탁 용역'. 너무 방심한 탓이었을까요? 제목 한 글자 안 바꾸고 수주한 사업을 버젓이 재하청한 건데요.

한국생산성본부 나라장터 사업 공고

한국생산성본부 나라장터 사업 공고


중소기업유통센터는 곧바로 항의에 나섰습니다. 생산성본부가 재하청 금지 의무를 위반했다고 문제를 제기했는데요. 결국 생산성본부는 공고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취소 사유란에는 '사업계획의 변경 등 불가피한 사유'란 궁색한 변명이 뒤따랐죠.

현재 중소기업유통센터는 발주처로서 관리·감독에 소홀했음을 인정하고 해당 사안에 대해 자체 감사를 진행 중입니다. 지난 4년 동안 생산성본부의 입찰 참여 과정에 문제가 없는지 면밀히 살펴보겠다는 계획인데요, 생산성본부가 중소기업유통센터의 입찰 업무를 지속적으로 방해한 사실이 인정되면 법적 대응도 검토하겠다고 하는군요.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럼 한국생산성본부의 입장은 뭘까요? 전체적인 사업 총괄은 생산성본부가 맡아서 했고, 사업수행비율 변경도 중소기업유통센터와도 이미 사전에 협의됐던 사안이라고도 반박했는데요. 정말 사전 협의가 됐더라면 중소기업센터가 법적 대응까지 고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효율적으로 업무를 추진하다 보니 파트너사에 일을 더 주게 되면서 사업수행비율이 변경됐다”고도 했는데요. 지난 몇 년 동안 똑같은 방식으로 수주해서 똑같이 진행해왔던 사업인데 이제 와서 문제 될 게 뭐가 있냐는 뉘앙스였습니다.

영화 '베테랑' 갈무리

영화 '베테랑' 갈무리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되는데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된다고 그랬어요.” -영화 '베테랑' 中-

책임지는 자세를 기대한 건 무리였을까요? 영화 '베테랑' 속 빌런인 재벌 3세 조태오를 연상케 하는 해명이었는데요. 한국생산성본부, 앞서 소개한 대로 산자부 산하의 공직유관단체죠. 부디 이번 일을 계기로 공직유관단체의 설립 취지와 존재 목적은 무엇인지 되돌아봤으면 합니다.

공직유관단체 제도의 취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등으로부터 재정지원 또는 임원 선임?등의 승인을 받는 등 공공성이 있는 기관?단체를 공직유관단체로 지정하여 공직윤리제도를 적용하기 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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