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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환의 중국은, 왜] #116 5호16국 후손 '경례아기' 띄우는 당의 정치공학

입력 2023-06-27 06:57 수정 2023-06-27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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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사회주의 중국식 경례법. 〈사진= 인민망 캡처〉

학생들의 사회주의 중국식 경례법. 〈사진= 인민망 캡처〉

2008년 쓰촨 대지진에서 극적으로 구조됐던 유아가 구조대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사진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이 사진을 보면서 시간의 강을 건너 15년 전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규모 8.0의 쓰촨 대지진의 참화는 도시와 산간 마을 가릴 거 없이 도처에서 목격됐습니다. 무너진 유치원 폐허 더미에서 지진 발생 20여 시간 만에 발견된 3세 아이는 현장에서 급조한 나무판 들것에 실려 세상 속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아이는 오른손을 들어 경례로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돼 신문과 방송을 도배했습니다.

참혹한 재난의 악몽 속에서 무겁게 가라앉았던 중국인들은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해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무력감을 이겨내고 재건의 삽을 뜰 수 있도록 인민을 통합하는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경례 아기(敬禮娃娃)'로 불렸던 랑정(郞錚ㆍ18)이 올해 가오카오(高考)에서 최상위 성적을 거뒀다는 소식입니다. 쓰촨성(省) 수험생 전체에서 상위 30명(0.003%) 안에 들었다고 합니다. 중국의 관영ㆍ비관영 매체들은 이 뉴스를 크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랑정의 인간승리 스토리가 며칠 간 뜨겁게 매체들을 달굴 것으로 보입니다.
 
베이징대학. 〈사진= 셔터스톡〉

베이징대학. 〈사진= 셔터스톡〉

중국 34개 성ㆍ시ㆍ자치구는 도농, 민족, 지역 등 변수가 달라 입시를 따로 진행합니다. 쓰촨성에서 상위 0.003%라면 중국 내에서 원하는 대학은 골라서 갈 수 있는 성적입니다. 이미 베이징대에서 러브콜을 보냈다고 하는군요.
 
2008년 쓰촨 대지진 당시 군인들에 의해 구조된 3살짜리 아기 랑정(왼쪽)과 15년 뒤 18살 소년으로 큰 랑정. 〈사진= 연합뉴스〉

2008년 쓰촨 대지진 당시 군인들에 의해 구조된 3살짜리 아기 랑정(왼쪽)과 15년 뒤 18살 소년으로 큰 랑정. 〈사진= 연합뉴스〉

랑정은 한족이 아닙니다. 강(羌)족입니다. 중국은 55개 소수민족과 1개 한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입니다. 강족도 이 중 하나입니다. 강족은 중국 역사에서 5호16국 시대를 무대로 활약했던 종족입니다.

4세기 초~5세기 초 중국 대륙을 휘저었던 흉노ㆍ선비ㆍ갈ㆍ저ㆍ강족 등 5호(한족 관점의 이민족)들이 세운 16개국 격동의 시기를 일컬어 5호16국 시대라고 합니다. 우리는 소수림왕, 광개토대왕, 장수왕이 고구려의 전성기를 열고, 백제에선 근초고왕이 영토를 확장하고, 신라의 내물이사금과 눌지마립간이 나라의 기틀을 세우던 시기였습니다.
 
5호 16국 시대. 〈사진= 사회과부도 캡처〉

5호 16국 시대. 〈사진= 사회과부도 캡처〉

그 옛날 대륙을 호령했던 강족이 지금은 31만명 정도 수준의 소수민족으로 남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무튼 당 선전부는 자질이라든가 불굴과 희망의 상징으로서 랑정의 '스타성'을 일찌감치 눈여겨봤던 것 같습니다.
 
〈사진= 인민망 캡처〉

〈사진= 인민망 캡처〉

중학생으로 큰 2018년에는 당 선전부 관할의 중국중앙방송(CCTV) '쓰촨 대지진 10주년 특집 방송'에 출연했었죠. 이듬해인 2019년 10월 1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신중국 건국 70주년 기념식에서는 강족과 '쓰촨 대지진 생존자'를 대표해 단상에 올랐습니다.


고등학생 때인 2021년엔 CCTV의 '백년가성(百年歌聲)'에 얼굴을 내비치며 '전국구'로 이름값을 했습니다.

랑정의 가오카오 성취는 미담인 건 틀림 없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품성과 자질은 어디 내놔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중국공산당 선전부 입장에서 주목하는 포인트는 그의 출신 배경일 겁니다.

인구 31만명의 강족.

강족 출신의 랑정 만큼 중국의 소수민족 동화 정책에 착 들어맞는 모델이 있을까 싶습니다.

중국은 다민족 국가답게 분리·독립이란 단어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1년 넘는 소모전 양상이 이어지면서 소련 붕괴 이후 다민족 사슬이 느슨해지면서 독립과 분쟁의 난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러시아의 현실은 당 지도부를 바짝 긴장 시킬 만한 일입니다.

소련 붕괴든 장기 소모전이든 다민족 통제가 이완돼 소수민족의 정치 활동이 늘어날 경우 중국 내 소수민족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감하게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공산당은 소련의 개혁ㆍ개방을 이끈 고르바초프에 대해 냉담한 스탠스를 취해왔습니다.

1991년 12월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에서 하야를 앞둔 시점 공산당 선전부 산하 신화통신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신사고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치적 다원주의는 정치적 혼란과 종족분쟁, 경제 위기만을 불러왔다”고 혹평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노선이 정치 혼란과 종족분쟁을 초래했다는 표현은 소수민족 문제를 분리독립과 연계해 사고하는 중국공산당의 강박증을 내포합니다.

 
쓰촨 지도. 티벳과 가장 근접한 위치에 있다. 〈사진= 셔터스톡〉

쓰촨 지도. 티벳과 가장 근접한 위치에 있다. 〈사진= 셔터스톡〉

티벳과 신장 지역은 분리·독립의 마그마가 지표 아래서 들끓는 지역입니다.강족은쓰촨성 서부와 가까운 간쯔티벳자치주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스타성 풍부한 소수민족 유아가 등장해 한족 주류에 통하는 성공 스토리를 써가고 있는 겁니다.

 
〈사진= AP, 연합뉴스〉

〈사진= AP, 연합뉴스〉

중국 인민의 사랑을 받는 강족 유아가 성장해 베이징대에서 수학하고 공산당의 관료로 출세한다는 서사는 소수민족 동화ㆍ통합정책을 펴는 중국공산당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 스토리일 겁니다.

어제 오늘 또는 한 주 내내 중국 주요 관영 매체를 덮을 랑정의 뉴스는 미담 자체의 힘뿐 아니라 고도로 계산된 당의 선전 전략이 가동되고 있다는 걸 시사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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