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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목 분홍·초록 색깔 유도선, 누가 처음 그렸을까?

입력 2023-05-16 07:00 수정 2023-05-18 16:55

'색깔 유도선 개발자' 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전화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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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 유도선 개발자' 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전화 인터뷰

노면 색깔 유도선. 〈사진=서영지 기자〉

노면 색깔 유도선. 〈사진=서영지 기자〉


고속도로에서 분기점을 제대로 찾지 못해 길을 지나치거나 미리 빠져나갔던 경험, 운전자라면 한 두 번쯤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분홍색과 초록색 선이 나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기 시작했죠.

내비게이션 안내에서도 어떤 색을 따라가야 할지 표시해줄 정도로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길잡이가 됐습니다.

실제로 한국도로공사가 2016년 이후 색깔 유도선을 설치한 고속도로 분기점과 나들목 76곳을 조사해보니 2016년 대비 2017년 교통사고가 27% 줄었습니다.

'진작 이렇게 색깔로 길을 알려줬으면 좋았을 법한데, 어려운 아이디어도 아닌데 왜 그전에는 이런 생각을 못 했던 걸까'라는 생각, 해보신 분 많으시죠?

그 쉽지만 어려운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은 멀리 아프리카 섬나라인 모리셔스에 파견 나가 있는 윤석덕 한국도로공사 해외사업처 해외사업운영팀 차장입니다.

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이 지난 8일 모리셔스에서 현지 직원들과 점심을 먹으며 웃고 있다. 〈사진=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이 지난 8일 모리셔스에서 현지 직원들과 점심을 먹으며 웃고 있다. 〈사진=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딸·아들 크레파스 그림에서 영감 얻어


어제(15일) 모리셔스에 있는 윤 차장과 전화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멀리 있는데 찾아 주셔서 감사하다"는 반가운 인사로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2010년 도로공사 경기 군포지사에서 근무할 때 서해안 고속도로 안산분기점은 늘 사고가 잦았습니다.

2011년 이전 한 해 평균 25건의 사고가 있었고 도로 관리자들에겐 늘 골칫거리였습니다.

2011년 3월에는 우회전 인천, 좌회전 강릉으로 엇갈리는 안산분기점 지점에서 화물차와 승용차가 실랑이를 벌이다 화물차가 콘크리트 시설물을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화물차 운전자가 숨졌습니다.

"초등학생도 알아볼 수 있는 쉬운 사고 방지책을 찾아오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윤 차장은 대책 마련에 머리를 싸맸습니다.

머리를 쥐어짜면서 집에 돌아왔는데 당시 여덟 살, 네 살이던 딸과 아들이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초등학생 눈높이로 색칠을 해보자!' 콜럼버스가 달걀을 깨서 세운 것 같이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의 가족 사진. 〈사진=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의 가족 사진. 〈사진=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당시 도로교통법상 다양한 색 표기 불가능…"사고 줄일 수 있으면 해보자"


하지만 2011년 당시 도로교통법상 도로에는 흰색과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 파란색만 칠할 수 있었던 것이 걸림돌이었습니다.

당시 인천경찰청 11지구대에서 안산분기점을 담당하던 임용훈 경사(현 인천경찰청 경감)에게 색깔 유도선을 그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역시 잦은 사고로 골머리를 앓던 임 경사는 윤 차장의 설득에 "교통사고를 줄일 수 있다면 해보자"며 적극행정 면책제를 활용해 도색 작업을 승인했습니다.

적극행정면책제란 공무원이 업무를 적극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공익성이 인정되면 발생한 비용이나 문제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는 제도입니다.

그렇게 2011년 5월 안산분기점에 대한민국 1호 색깔 유도선이 그려지게 됐습니다.

이후 사고 감소효과가 확인되면서 2021년 4월 분홍색과 초록색이 도로교통법상 칠할 수 있는 색깔로 공식적으로 추가됐습니다.





"튀려면 확 튀어야"…여러 색 섞어 만든 분홍·초록색


윤 차장은 처음에 분홍색과 초록색을 생각했다가 분홍색이 너무 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주황색을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도로 가드레일 보수업체 소장이 주황색은 노란색과 비슷해 도로에서 침범하지 말라는 규제의 의미로 운전자가 받아들여 헷갈릴 수 있다는 의견을 줬습니다.

"안내선인데 튀려면 확 튀는 게 나지 않겠냐"는 소장의 의견에 원래대로 분홍색으로 추진했습니다.

색을 정했지만 이번에는 페인트가 문제였습니다. 당시 도로용 페인트에 분홍색과 초록색이 없었던 겁니다.

차선에 쓰는 페인트는 마모에 강하고 반사가 잘 돼야 합니다.

"차선 도색 업체 사장님이 도로용 페인트와 일반 페인트 중 빨간색과 흰색을 섞어 분홍색을 만들어줬어요. 파란색과 노란색, 흰색을 섞어 초록색을 만들어주셨고요."

2017년 국토교통부에서 '노면 색깔 유도선 설치 및 관리 매뉴얼'을 만든 이후에야 페인트 회사들이 분홍색과 초록색 도로용 페인트를 개발했습니다.


연평균 25건 교통사고, 설치 직후 6개월 3건


안산분기점에서는 색깔 유도선 설치 이후 한해 평균 25건이던 교통사고가 6개월 동안 3건으로 줄었습니다.

이후 경부고속도로 판교나들목에도 색깔 유도선이 설치되면서 전국으로 확대됐습니다.

지금은 도로공사가 관리하는 전국 고속도로 분기점과 나들목 총 905곳에 색깔 유도선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제는 여기저기서 쉽게 볼 수 있는 색깔 유도선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지 물었습니다.

윤 차장은 "어떻게 편하게 바꿀 수 있을까 고민하고 노력했던 부분이 많은 분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성과로 나타나 참 잘했다, 참 편해졌다 생각이 든다"며 "그들이 고맙다고 해주는 복을 받아서 지금 인생이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 당시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게 애들이 있었다는 점, 아이디어를 지지하고 도움 주신 분들이 있었기에 여러 가지가 딱딱 맞아 떨어져서 할 수 있었다"고 감사를 전했습니다.

지난 해 아들의 담임 선생님이 "우리 군포에 노면 색깔 유도선을 칠하자고 아이디어를 낸 분이 사신다"고 말했을 때 친구들이 "태경이 아버지가 그렸어요!"라고 대답해 아들이 아주 자랑스러워했다는 일화도 들려줬습니다.

윤 차장은 2020년 8월 tvN 채널의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에도 출연했습니다. 이후 도로공사사장상을 받았고, 2021년 7월 7일 도로의날에는 국토교통부 장관 표창과 시계를 받았습니다.

2020년 8월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사진=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2020년 8월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사진=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차장〉



"매뉴얼에 따라 정해놓은 색으로 칠해줬으면"


다만 그는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색깔 유도선을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칠한다거나 분홍색과 초록색을 바꿔 칠하는 경우가 있어 국토부의 매뉴얼에 따라 설치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보통 초록색은 좌회전을, 분홍색은 우회전을 뜻합니다. 나가는 길이 2개일 땐 첫 번째가 분홍색, 두 번째 길이 초록색입니다.

이 색을 바꿔놓으면 운전자들이 헷갈릴 수 있기 때문에 색깔을 칠할 때 정해놓은 약속을 지켜달라고 윤 차장은 강조했습니다.

2년 반 동안 파견 가 있는 아프리카 모리셔스에서도 윤 차장은 목표가 있습니다. 아프리카 현지에도 색깔 유도선을 적용해보는 것입니다.

그는 "아직 온 지 한 달밖에 안 돼서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색깔 유도선을 적용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그가 은퇴하기 전에 세워 둔 목표도 있습니다. 겨울마다 골칫거리인 블랙 아이스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윤 차장은 "한국에 돌아가면 비용이 많이 들지 않고 쉬운 방법으로 블랙 아이스 문제를 해결해보고 싶다. 사명감을 갖고 해보겠다"며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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