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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욱의 기후 1.5] 모처럼 보인 희망…시민사회에서 시작하는 '풀뿌리 에너지전환' (상)

입력 2023-04-24 08:00

'먼 미래'에서 '내 일'로 찾아온 기후변화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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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미래'에서 '내 일'로 찾아온 기후변화 (180)

2020년 기준, 우리나라의 1차 에너지 수입의존도는 92.9%에 달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거의 대부분'이 수입산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연재를 통해서도 강조했듯, 이는 우리의 안보와도 직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2020년 기준, 원유는 중동(69%), 주요 전력 발전원인 무연탄과 우라늄은 중국과 러시아(무연탄 54%, 우라늄 34%)에 크게 의존하고 있죠. 우리가 타고 다니는 주요 운송수단도, 매일 당연히 '틀면 나오는' 것으로 여기는 전기도,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 하는 겁니다. 2023년 1월, 우리나라의 에너지 플로우에 따르면, 이 의존도는 무려 95.7%에 달합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모처럼 보인 희망…시민사회에서 시작하는 '풀뿌리 에너지전환' (상)
이러한 '의존도'는 국내로 스케일을 줄여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어딘가는 에너지를 생산하고, 어딘가는 소비하고 있는 것이죠. 모두가 상상할 수 있듯, 전국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서울은 대표적인 '에너지 소비 지역'입니다. 서울에서 쓰는 전기 가운데 서울에서 직접 만들어지는 전기는 11.2%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88.8%는 다른 지역에서 끌어다 온다는 뜻입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모처럼 보인 희망…시민사회에서 시작하는 '풀뿌리 에너지전환' (상)
2020년, 서울의 연간 전력 사용량은 4만 5,788GWh로 경기, 충남에 이어 3번째로 많습니다. 이렇게 전력 수요는 큰데, 생산량은 그에 미치지 못하면서 매우 낮은 전력 자립도를 보인 겁니다. 지역별 전력 자립률을 살펴봤습니다. 지역별 전력 생산량을 소비량으로 나눈 값입니다. 전국에서 자립도가 가장 낮은 지역은 대전(1.8%)이었습니다. 광주(7.1%), 충북(8.3%)에 이어 서울은 전국 17개 광역시도 가운데 4번째로 저조한 자립률을 기록했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모처럼 보인 희망…시민사회에서 시작하는 '풀뿌리 에너지전환' (상)
반대로, 열심히 발전해서 타지에 송전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인천(241.7%)과 충남(226.3%), 경북(209.4%)의 경우, 자신들이 쓰는 전력량보다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해 도시로 보내주고 있습니다. 이들 지역 외에도 부산(198.2%), 전남(188%), 강원(172.9%), 세종(104.7%), 경남(103.7%) 또한 스스로 사용하는 양보다 더 많은 양의 전기를 만들고 있죠. 자립률이 200%를 넘는 지역의 경우 석탄화력발전과 원자력발전을 중심으로 발전소가 집중된 곳으로, 직·간접적인 피해나 불편을 감수하고 있고요. 이처럼 '만드는 곳 따로, 쓰는 곳 따로'있는 전기지만, 요금은 모두 동일합니다.

이런 가운데, 그 요금마저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유지되어오고 있습니다. 쌀값보다 밥값이 더 싼, '적자'라는 이름의 빚을 미래 세대에게 떠넘기는, 위험한 폭탄 돌리기가 지속적으로진행 중인 겁니다. 지금껏 당적에 상관없이 그 어떤 정부도, 정당도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애써 외면만 해왔던 것이죠. '표 떨어지는 소리'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모처럼 보인 희망…시민사회에서 시작하는 '풀뿌리 에너지전환' (상)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과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과 전기요금을 비교해봤습니다. 우리의 전기요금은 산업용, 가정용 할 것 없이 '세계 최저 수준'입니다. 우리 땅에서 막 에너지가 솟아나서 저렴할 수 있는 걸까요.

국가의 에너지 생산량을 총 1차 에너지공급량(TPES, Total Primary Energy Supply)으로 나눠 나라별 에너지 자립도를 살펴봤습니다. 비교 대상으로 꼽은 다른 5개 국가 가운데 우리보다 이 값이 더 작은 나라는 일본뿐이었습니다. 일본이 후쿠시마 참사를 겪지 않았다면, 전체 6개 나라 중 자립도 꼴찌는 한국의 차지였을 겁니다. 우리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자체 생산'하는 나라들도 전기요금은 용도에 상관없이 더 높습니다. 이들 나라라고 해서 '표' 걱정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들 나라라고 해서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복지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이처럼 기형적인 가격 구조로 비롯되는 결과는 '어딘가에 누적될 적자'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전 세계의 에너지가 급격한 대전환에 나서는 이 시점에서, 이는 '새로운 변화'를 막는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기존의 전력 생산 시스템에서도 적자가 쌓이는데, 발전 방식과 송배전 방식을 바꿀 재원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동차와 비교했을 때, '페이스리프트' 급 변화라면 어디서든 십시일반 돈을 끌어와 임기응변, 땜질식 대응을 하겠지만, 지금의 전환은 완전한 '풀체인지', 그것도 내연기관에서 전혀 새로운 형태인 전기차로의 전환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에너지전환의 시발점이 '에너지 요금의 정상화'에 있는 이유입니다.

(재) 기후변화센터와 청년 활동가로 조직된 '클리마투스 컬리지'가 에너지 비용 정상화를 요구하는 시민 1,005명의 서명을 기획재정부에 전달했다.(재) 기후변화센터와 청년 활동가로 조직된 '클리마투스 컬리지'가 에너지 비용 정상화를 요구하는 시민 1,005명의 서명을 기획재정부에 전달했다.
그런데, 최근 시민사회를 시작으로 새로운 전환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당·정·청이 모두 '표'를 이유로 문제를 외면해왔는데, 이 '표'의 주인인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의미 있는 목소리와 행동이 나오고 있는 것이죠.


재단법인 기후변화센터(이사장 유영숙 전 환경부장관)와 기후변화에 관심 있는 청년들이 모인 '클리마투스 컬리지'는 지난 21일 '에너지 비용의 정상화'를 정부에 공식적으로 요구했습니다. 이날까지 서명에 참여한 1,005명의 서명을 기획재정부에 전달한 겁니다. 청년들의 요구는 직관적이고도 명확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기요금은 지금까지 비정상적이었습니다. 에너지 원료 가격의 상승으로 국내 에너지 시장은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정부는 물가인상을 이유로 에너지 비용의 정상화를 보류하고 있습니다. 비정상적인 에너지 비용으로 탄소중립을 위한 에너지 신산업 분야에 대한 기업의 기후대응 투자가 줄어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온실가스 감축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비정상적인 에너지 비용은 에너지 효율을 개선할 수 없는 여건을 만들기도 합니다.

정부는 산업적, 경제적, 기후환경적 부담을 미래세대에 전가하지 않도록 에너지 비용을 정상화하고, 기후산업을 육성해 미래 세대에게 희망을 보여주세요. 취약계층은 두텁게 보호하면서 국민적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요금 인상안을 마련해주시고, 정상화한 요금으로 기후산업을 육성해 탄소중립 목표 달성과 양질의 일자리를 마련해주시기 바랍니다.”
클리마투스 컬리지 '에너지 비용 정상화 요구 서명'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기 전날 밤, 책임 있는 어른들의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의 민간위원들도 에너지 요금의 정상화를 촉구한 겁니다. 김상협 위원장(카이스트 부총장)과 하윤희 위원(고려대학교 교수), 이규진 위원(아주대학교 교수) 등은 “전기요금 현실화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강조했습니다. 민간위원들은 이 문제와 관련한 입장문을 내기 전, 총 33명의 민간위원을 대상으로 의견을 취합하고, 설문조사를 통해 공감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설문에 응답한 28명 중 23명은 “NDC 목표의 차질 없는 달성과 에너지 시장의 왜곡을 시정하기 위해 한전의 강력한 자구노력을 전제로 한 전기요금의 인상이 시급하게 추진되어야 한다”는 데에 동의했습니다.

“책임감 있고 혁신적인 탄소중립을 실현하고, 저탄소 사회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위해 추진해야 할 과제들은 상당 부분 서로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산업, 건물, 수송 등 여러 부문에 걸쳐 수요 효율화 혁신을 추진하고, 시장원리에 기반한 합리적 에너지 요금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온실가스 감축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당면 현안인 전기요금 현실화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민간위원 입장문

김상협 위원장은 “에너지 절약과 효율화, 온실가스 감축과 기술혁신을 위해선 에너지 가격의 합리화가 급선무”라며 “차제에 에너지 가격 결정 체계의 독립화 방안을 비롯, 취약계층 보호 대책도 강구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모처럼 보인 희망…시민사회에서 시작하는 '풀뿌리 에너지전환' (상)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러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 연말, 161번째 연재 〈[박상욱의 기후 1.5] '샤이 탄소중립'? 조용히 높아진 기후 감수성〉을 통해서도 한국 시민사회의 수준 높은 기후 감수성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각자가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서로의 이같은 '기후 감수성'을 알아차리지 못 한 채 지내왔던 것이죠.

2019년 3월, 전국의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국리서치가 실시했던 설문조사에서도 이는 명확히 드러났습니다. 응답자의 93%가 “일상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영향을 체감한다”고, 82%는 “기후변화가 일상, 사회경제활동, 재산 및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고 답했습니다. 시민 대부분은 이러한 문제를 “국가나 개인이 노력하면 막거나 늦출 수 있다”며 “비용이 더 들더라도 에너지 절약에 도움되는 친환경 제품을 사용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고요.

[박상욱의 기후 1.5] 모처럼 보인 희망…시민사회에서 시작하는 '풀뿌리 에너지전환' (상)
성인남녀 1,600명과 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 이뤄진 한국환경연구원(KEI)의 2021년 〈2050 탄소중립 일반 국민·전문가 인식조사〉에서도 공통된 인식이 확인됐습니다. 연령대별로 골고루 80% 안팎의 시민들이 비용부담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죠. 특히, 전기요금에 있어서도 일반 시민의 3분의 1이 매달 5천~1만원 가량의 인상을 수용할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4인 가구 월평균 전기요금이 약 4만원 가량인 만큼, 이는 12.5~25%의 인상폭에 해당합니다.

탄소중립 이행과 에너지전환 과정을 두고, 온갖 걱정이 앞서는 요즘이지만, 시민사회에서 시작한 이러한 움직임은 변화의 씨앗이 되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아무리 전문가들이 모여 고민하고, 의견을 나눈 '좋은 정책'이라 할지라도, 시민사회의 무관심 혹은 반발 속에선 그 역할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모처럼 보인 희망…시민사회에서 시작하는 '풀뿌리 에너지전환' (상)
박상욱 기자 park.lepremier@jt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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