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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욱의 기후 1.5] 세계 최초 '탈원전' 실천 국가의 등장

입력 2023-04-17 08:00

'먼 미래'에서 '내 일'로 찾아온 기후변화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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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미래'에서 '내 일'로 찾아온 기후변화 (179)

현지시간 15일, 세계 최초로 '탈원전' 국가가 등장했습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원전을 운영하지 않은 나라는 있어도, 원전 운영을 하고서 이를 완전히 멈춰버린 곳은 없었습니다. 1979년 스리마일아일랜드 참사를 겪은 미국도, 1986년 체르노빌 참사를 겪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도, 그리고 2011년 후쿠시마 참사를 겪은 일본도 여전히 원전을 운영하고 있죠. 그렇다면, 이런 '전에 없던' 결단을 실천으로 옮긴 나라는 어디일까요. 바로 독일입니다.

독일은 1961년 이래로 원전을 가동해왔습니다. 한때는 최대 37기의 원전이 함께 가동될 정도의 원전 강국이었죠. '세계에서 가장 원전이 밀집된 나라'로 꼽히는 우리의 경우, 현재 25기의 원전이 가동 중입니다. 여기에 예정 원전 5기(신한울 2·3·4호기, 신고리 5·6호기)까지 모두 운전을 시작한다 해도 독일의 기록을 넘어서긴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독일은 일찍이 탈원전을 선언하고, 차분히 원전의 질서있는 퇴장을 준비해왔습니다. 2011년, 앙겔라 메르켈 당시 총리는 후쿠시마 참사를 계기로 원전 없는 독일을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오늘부터 당장 모든 원전을 멈추겠다'는 것이 아닌, 노후 원전들부터 자연스럽게 'Phase out(단계적 폐지)'하겠다는 계획이었죠. 이 계획에 따라 마지막 남은 원자력발전소는 3곳. 엠스란트 원전과 네카베스트하임2 원전, 그리고 이자르2 원전이었습니다.
독일의 이사르 원전이 현지시간 15일 0시를 기해 가동을 멈췄다.독일의 이사르 원전이 현지시간 15일 0시를 기해 가동을 멈췄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지난해를 끝으로 문을 닫았어야 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났고, 이들 원전의 수명은 한시적으로 4개월 연장됐죠. 독일은 다른 EU 회원국들보다도 더 타격이 컸습니다. 러시아로부터 파이프라인을 통해 공급받는 천연가스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현재 진행형이지만 원전의 수명 연장은 더는 없었습니다. 15일 자정을 기해 이들 원전은 문을 닫았고, 그렇게 독일의 60년 넘는 원전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됐습니다.

독일은 어떻게 원전 없는 에너지 공급을 준비했을까요.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부총리는 원전 3기의 중단을 앞두고 “2030년까지 독일에서 재생에너지의 발전 비중은 80%에 달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원전 폐기를 우려하던 이들에겐 '거짓말'처럼 들릴 만큼 높은 목표였습니다. 과연 갑작스러운, 부총리의 실언이었을까요. 지난 수십년간 독일의 에너지 관련 통계를 통해 이를 살펴보겠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세계 최초 '탈원전' 실천 국가의 등장
지난 30년간 독일은 단순히 '발전원의 변화'를 넘어 '에너지의 변화'를 꾀했습니다. 1990년, 연간 7,794TJ이나 됐던 에너지 생산량은 2020년 4,046TJ로반토막 났습니다. 나라의 경제가 크게 휘청였기 때문일까요. 차근차근, 사회 곳곳에서 '에너지 덜 쓰는 사회로의 전환'에 나선 결과입니다. 그 결과, 1차에너지 총 공급량 역시 30년새 21% 줄었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같은 기간 37%나 줄었습니다.

시민들이 불편을 감수하면서 전기 사용을 줄이기라도 했던 걸까요? 독일의 최종 전력 소비량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는 곧, 온실가스 배출 없는 새로운 에너지로의 전환에 착실히 나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전 역시 '무탄소 발전원'으로 꼽히는 만큼, 탈원전 이행 과정에서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은 결국 에너지 효율 개선과 재생에너지의 확대라는 두 축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세계 최초 '탈원전' 실천 국가의 등장
제조업의 에너지 집약도는 2000년 1달러당 4.24MJ에서 2019년 3.1MJ로, 서비스업의 에너지 집약도는 2000년 1달러당 0.6MJ에서 2019년 0.46MJ로, 주거용 건물의 에너지 집약도는 2000년 ㎡당 0.84GJ에서 2020년 0.64GJ로 줄었습니다. 꾸준하고도 괄목할 만한 효율 개선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통계입니다.

재생에너지의 확대는 탄소 집약도의 급감으로 이어졌습니다. 무탄소 전원이 늘어난 만큼, 전력의 탄소 집약도는 20년새 40% 가까이 줄었고, 그 결과 최종 에너지의 탄소 집약도 역시 2000년 MJ당 83.84g에서 2020년 65.88g으로 개선됐습니다. 결국, 1달러의 GDP를 얻기 위해 배출됐던 이산화탄소의 양은 2000년 286.5g에서 2020년 171.1g으로 크게 줄었습니다. 독일의 경제가 점차 탄소로부터 자유로워진 겁니다.

그럼 지금부턴, 독일의 발전 믹스가 어떻게 달라져왔는지, 2000년부터 2022년까지의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세계 최초 '탈원전' 실천 국가의 등장
2000년에만 하더라도, 독일의 발전믹스는 '탈탄소'와 '탈원전'을 논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석탄의 발전비중은 무려 52.8%에 달했죠. 원자력은 석탄 다음으로 가장 많은 발전 비중을 차지했고요. 이런 구조는 1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10년의 세월 중에서도 재생에너지의 비중은 꾸준히 늘어갔습니다. 2000년 6.1%에 불과했던 '비 연소 재생에너지'의 발전 비중은 2010년 12.3%로 2배가 됐죠. 원전의 비중은 2000년 29.4%에서 2010년 22.2%로 소폭 줄어들었습니다.

메르켈 총리가 2011년 공식적으로 탈원전을 선언한 것은, 이러한 변화에서 '가능성'이 엿보였기 때문일 겁니다. '탈탄소'와 '탈원전'이 그저 공허한 정치적 수사에 그치지 않고, 실현할 수 있다는 근거가 없었다면 '무모한 선언'은 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또 10년이 지난 2020년, 석탄발전의 비중은 25%로, 원전의 비중은 11.2%로 줄어들었습니다. 태양광과 풍력, 수력, 지열의 발전 비중은 35.9%까지 높아졌고요.

순탄하게만(물론 대내외적으로 여러 갈등과 문제들이 있었지만) 보였던 독일의 탈탄소, 탈원전이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난 2021년과 2022년. 그들은 현명한 대처를 통해 위기를 타개했습니다. 갑작스럽게 PNG(파이프라인 천연가스)의 공급이 끊기고, 대체할 전력을 급히 구해와야 하는 상황에서 석탄과 LNG는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을 위해 활용해야 할 '임시 방편'이었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세계 최초 '탈원전' 실천 국가의 등장
신속한 에너지원의 확보와 이를 통한 부족한 전력 공급량의 확충을 위해 '일 보 후퇴'를 한 셈입니다. 독일은 이와 동시에 '십 보 전진'을 준비했고, 그 결과는 2022년 발전량 통계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2022년, 독일의 연간 재생에너지 발전비중은 무려 45.2%에 달했습니다. 원전의 비중은 5.9%, 석탄의 비중은 32.3% 천연가스의 비중은 14.4%로 묶었습니다. 열악한 상황 속 독일의 선전은 우리의 발전믹스와 극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IEA에 따르면, 지난해 독일(55만 2,484GWh)과 우리나라(56만 5,378GWh)의 전체 발전량은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각 발전원별 비중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우리의 지난해 재생에너지 발전비중은 불과 8.9%. 석탄은 여전히 30.9%로 '제1 발전원'이었고, 한 해 발전량의 절반 이상이 화석연료에서 비롯됐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세계 최초 '탈원전' 실천 국가의 등장
우리나라와 독일이 차이를 보인 것은 그저 발전믹스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동안, 독일이 꾸준히 에너지 생산량과 1차에너지 총 공급량을 줄이고, 이를 통해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해온 것과 달리 우리는 정 반대 행보를 보였습니다. 1990년, 947TJ에 불과했던 에너지 생산량은 2020년 2,206TJ로 배 넘게 커졌고, 1차에너지 공급량 또한 같은 기간 93Mtoe에서276Mtoe으로 거의 3배가 됐습니다. 최종 전력 소비량은 1990년 독일의 5분의 1 수준이었지만 30년 후, 560TWh로 독일을 넘어섰고요. 위의 4개 그래프 가운데 우리나라가 감소세를 보인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감축에도 실패했고, 그다지 큰 효율 개선도 이뤄내지 못 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독일은 어떻게 이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요. 다음의 통계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세계 최초 '탈원전' 실천 국가의 등장
독일의 공공 에너지 부문 RD&D(연구, 개발 및 실증) 예산은 20년새 3.7배로 늘었습니다. 일시적으로 특정 시기에 예산 증가가 집중된 것이 아닙니다. 2000년, GDP 1,000달러당 498.7달러였던 공공 에너지 RD&D 에산은 2005년 688.6달러로, 2010년 1,028.8달러, 2015년 1,392.7달러, 그리고 2021년 1,850.3달러로 해마다 차근차근 증가했죠. 국가가 세우는 '백년대계' 중 하나인 에너지 분야에 있어 게르하르트 슈뢰더, 앙겔라 메르켈 두 총리가 지속적인 관심을 보인 겁니다.

한 번 발전소를 지으면 최소 30년은 사용하고, 전문적인 유지 관리와 수명 연장 등을 통해 그 수명은 더 늘어날 수 있습니다. 에너지 정책엔 신구 정권을 관통하는 공감대와 합리적인 판단, 철학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실제, 독일의 세부 분야별 예산의 증감 추이를 보면, 1990~2021년까지 조화로운 전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1990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원자력 분야 RD&D 예산은 점진적으로 줄어들었고, 이와 보조를 맞추며 재생에너지와 에너지 효율 부문 예산은 점차 증가했습니다.

반면, 우리의 세부 분야별 예산 변화를 살펴보면, 당장 '꾸준한 증가세'부터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2007년, GDP 1,000달러당 852.1달러에 달했던 RD&D 예산은 이듬해 690.5달러로 19% 급감했습니다. 이 예산은 이듬해 갑자기 반등하더니 2011년, 또 다시 줄어들었죠. 2013년부터 2018년까지 5년간은 내리 감소세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세부 분야별 예산분포를 보더라도, '당시 정권의 입맛'이 너무도 노골적으로 드러날 만큼 RD&D 예산의 분포는 급변했습니다.

독일의 탈원전 소식에 국내 곳곳에선 환영의 목소리와 함께 이전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탈 탈원전'으로 답한 현 정부를 향한 '탈 탈 탈원전'을 외치는 목소리도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탈 탈원전'과 '탈 탈 탈원전' 모두, 그 '과정'에 대해선 핵심을 회피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탈 탈원전'을 외치는 정부는 정작 신규 원전의 건설 계획이나 사용후핵연료 등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의 영구처분장 건설 계획에 대한 뚜렷한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원전 생태계 복원'이라는 키워드는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지을 줄만 알고 해체할 줄은 모르는 '반쪽짜리 생태계'가 이어지고 있고요. '탈 탈 탈원전'을 외치는 쪽은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한 기본 전제 조건인 '전력 가격 정상화'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큰 목소리를 내지 못 하는 모습입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세계 최초 '탈원전' 실천 국가의 등장
앞서 살펴본 각종 통계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독일의 탈원전은 오랜 기간 연속성을 갖고 꾸준히 준비하고 노력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모든 원전의 가동 중단'은 탈원전의 끝이 아닌 시작에 가깝습니다. 그간 사용했던 사용후핵연료를 영구히 처분할 장소를 찾고, 원전을 해체해 발전소 부지를 오롯이 시민들에게 돌려줬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탈원전이 완성될 겁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요. 2030년과 2050년까지의 첫 탄소중립 국가 전략 및 계획을 내놓은 정부가 과연 어떤 방향성과 철학을 보여줄까요. 당·정·청의 '입'이 아닌 예산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정부의 에너지 분야 씀씀이를 모두 함께 유심히 지켜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세계 최초 '탈원전' 실천 국가의 등장
박상욱 기자 park.lepremier@jt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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