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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왜] 30년 전 덩샤오핑의 '픽'…'서열 4위' 왕양의 급부상

입력 2021-08-28 07:02 수정 2021-08-28 13:04

덩샤오핑 만난 뒤 개혁 아이콘으로 부상
중소도시 시장서 부성장으로 '로켓 승진'

파벌서 자유롭고 실무 추진력 탁월
시진핑 후계자? 리커창 총리 후임?
대만·홍콩언론, 차기 대세로 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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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만난 뒤 개혁 아이콘으로 부상
중소도시 시장서 부성장으로 '로켓 승진'

파벌서 자유롭고 실무 추진력 탁월
시진핑 후계자? 리커창 총리 후임?
대만·홍콩언론, 차기 대세로 거론

 왕양 중국 정협주석.〈사진=바이두 백과 캡처〉 왕양 중국 정협주석.〈사진=바이두 백과 캡처〉


인구 100만명 수준으로 전국 333개 지급(地級)도시, 안후이(安徽)성으로 좁히면 16개 지급(地級)도시 가운데 하나인 평범한 도시. 이 도시의 시장에서 일약 성 정부의 부성장으로 도약. 몇 단계를 뛰어 넘는 '로켓 승진'으로 1993년 3월 전인대에 화려하게 데뷔한 정치 신인이었죠.

이런 승승장구 배경엔 덩샤오핑이 있었습니다. 덩샤오핑과 연결되는 이른바 '아빠 찬스'가 작용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30년이 흘렀지만 관련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덩샤오핑은 1992년 88세 노구를 이끌고 상하이·선전 등 중남부 도시를 돕니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개혁·개방을 계속 추진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극심한 노선 투쟁이 정점을 향해 치닫던 때였죠. 무관의 실권자 덩샤오핑은 회심의 카드를 뽑습니다. 그 유명한 남순강화(南巡講話·남쪽 지방을 돌며 말하다)입니다. 덩샤오핑은 이 여정에서 중국이 갈 길은 개혁ㆍ개방 뿐이라고 지지 의사를 밝힙니다.

덩샤오핑의 개입으로 팽팽하던 노선 대치의 균형이 무너졌습니다. 후폭풍을 차단하기 위해선 여정은 물론 개별 일정까지 치밀하게 기획돼야 합니다. 뉴스메이커의 말과 행동은 그 위상만큼 파괴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덩의 여정은 '개혁개방 일번지' 선전(深?)을 비롯해 경제 특구 주하이(珠海)와 연해 경제발전 도시의 상징인 상하이까지 촘촘히 짜여졌습니다. 여정이 씨줄이라면 누구를 만나서 어떤 대화를 나누냐는 일정은 날줄이었습니다. 하이라이트는 퉁링. 덩은 퉁링 시장을 만난 자리에서 대뜸 묻습니다.

"개혁·개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당연히 물을 질문이었습니다. 덩이니까요. 이 남자는 짧고 굵게 아편전쟁 이후 굴욕의 중국 근현대사를 되짚으며 개혁·개방의 당위성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 덩샤오핑, 주룽지 총리에 "잘 키우라"

덩샤오핑의 심정이 어땠을지 미뤄 짐작이 갑니다. 일설에는 감동 받은 덩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덩샤오핑은 주룽지 총리에게 '이 친구 물건이다. 잘 키워라' 는 취지의 인사 소견을 밝혔다고 전해집니다. 다음해 발탁 인사로 부성장에 오릅니다.

당시 37세였던 안후이성 퉁링시 시장 왕양 이야기 입니다. 최연소 부성장으로 단박에 개혁의 아이콘으로 솟아올랐습니다.

 
1991년 11월 퉁링시장 왕양이 기고한 글 '깨어나라, 퉁링' . 그해 중국신문상 1등에 선정됐다. 〈사진=바이두 백과 캡처〉1991년 11월 퉁링시장 왕양이 기고한 글 '깨어나라, 퉁링' . 그해 중국신문상 1등에 선정됐다. 〈사진=바이두 백과 캡처〉

이 유명한 에피소드를 보며 한 가지 의문이 일었습니다. 퉁링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덩샤오핑이 333개의 지급 도시 중의 하나에 불과한 퉁링 시장을 불러낸 것일까.

사연이 있었던 겁니다. 1991년 11월 왕양은 퉁링의 일간지 퉁링보의 1면을 채우는 기고문을 싣습니다. 제목은 ”깨어나라, 퉁링“. 약 4000자 짜리 기고문에서 왕양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요지만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개혁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역사는 우리가 상품 경제 앞에서 긴 잠을 자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연해 지역의 경제는 올라섰고, 산둥의 경제도 살아났다. 내륙 도시들도 우리를 추격하고 있다.”

“일체의 사상을 해방하라. 일체의 부패·봉건쇄국 사상을 수술하라.”

'시장경제냐, 계획경제냐'를 놓고 극단의 노선 투쟁이 벌어지던 와중에 과감하게 개혁·개방의 요체인 시장 경제의 봉화대에 횃불을 붙인 겁니다. 왕양은 단박에 전국구로 체급을 올렸고 이 기고는 그해 신문상 1등을 차지했습니다.

 
〈사진=바이두 백과 캡처〉〈사진=바이두 백과 캡처〉

덩샤오핑과의 만남 이후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부총리를 거쳐 공산당 정치국 상임위원회 의전 서열 4위의 정협 주석에 오른 왕양은 이제 대만과 홍콩 언론을 통해 시진핑의 후계자인 당 총서기 또는 리커창 총리의 후임 총리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시진핑은 2018년 개헌을 통해 국가주석의 연임 제한 조항을 폐지해 3연임 길을 열었습니다. 이 때문에 후계자를 벌써 낙점할 리 없다는 반론이 나오는 가운데 이력상 리커창 후임의 경제 전담 총리가 유력하다는 관측도 무성합니다.

왕양의 이력 가운데 가장 화려하게 언론의 주목을 끌었던 때는 '개혁·개방의 기관차' 이자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성(省)인 광둥성 서기를 맡았을 때였습니다.

 
〈사진=바이두 백과 캡처〉〈사진=바이두 백과 캡처〉

■ 공부론 vs 선부론…경제 둘러싼 노선 투쟁

중국에는 두 가지 경제관이 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답게 모두에게 균등하게 부가 배분돼야 한다는 공부론(共富論)과 덩샤오핑 식으로 먼저 부자를 만든 후 균등 분배하자는 선부론(先富論·능력 있는 사람이 먼저 부유해지는 것)입니다. 두 세계관은 종종 노선 투쟁을 벌이며 살벌하게 맞붙곤 합니다.

왕은 덩샤오핑과 같은 선부론의 대표 주자입니다. 한 마디로 성장 우선주의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파이를 키우자는 겁니다.

2011년 일입니다. 보시라이(薄熙來) 충칭(重慶)직할시 서기와 왕양 광둥성 서기가 맞붙었습니다. 어떻게 경제를 운용할 것인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둘 다 차기 상무위원 후보로 거론되던 사람들입니다. 누가 더 인민의 뇌리에 각인되는 실적을 쌓아 최고 권부(상무위원회)의 한 자리를 꿰찰 지 내외의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광둥성의 성도 광저우시.〈사진=바이두 백과 캡처〉광둥성의 성도 광저우시.〈사진=바이두 백과 캡처〉

보시라이는 공부론이었죠. “중국이 파이(경제 성장의 과실)를 잘 분배할 때”라며 공공임대주택 건설, 호적 개혁 등 빈곤층을 겨냥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성장의 열매를 제대로 맛 보지 못한 방대한 기층의 인민들은 열광했습니다. 보시라이가 신좌파의 기수로 각광 받았던 이유입니다.

■ 광둥모델 vs 충칭모델…누가 이길까 초미 관심 끌어

반면 직전 충칭시 서기였던 왕양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봤습니다. 충칭에 대해선 더 잘 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을까요? “파이를 더 키워야 한다”며 온건한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당내 개혁파를 대변했습니다. 왕양이 주도한 일련의 시장 중시 정책은 '광둥 모델'로 불리기도 했었죠.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로 광둥성의 금융기관과 중소기업들이 도산 위기에 저했을 때도 “시장 원칙을 거스르는 인위적인 지원은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GDP 성장률을 8%대로 지킨다는 '바오바(保八)'에 대해,“GDP 수치는 별로 중시하고 있지 않다”, “불경기에 성장이 무디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대대적인 국영기업의 구조개혁을 단행했습니다.

팽팽하던 둘의 논쟁은 2012년 3월 보시라이가 뇌물수수·공금횡령 등 부패 혐의로 낙마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보시라이의 공부론도 잠수에 들어갔습니다.

 
 광둥성의 성도 광저우시.〈사진=바이두 백과 캡처〉 광둥성의 성도 광저우시.〈사진=바이두 백과 캡처〉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시진핑이 공동 부유를 내걸고 공부론을 되살리고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지난 17일 시 주석 등 핵심 지도부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연 제10차 중앙재경위원회 회의에서 분배의 기능 강화에 초점을 맞춘 '공동 부유' 목표를 공식 천명했습니다. 이후 빅테크를 중심으로 조 단위의 기부 다짐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당의 노선에 발빠르게 보조를 맞추는 생존 감각인 거죠.

그렇다면 이렇게 시진핑과 왕양의 노선이 다른데 왕양을 후계자든 후임 총리든 시진핑이 발탁을 하려 했다는 게 이해가 안될 수 있습니다. 물론 보시라이와 치고 박던 때로부터 이미 10년이 흘렀으니 이젠 때가 됐다고 입장을 바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왕양 발탁의 배경으로 짚이는 게 있습니다.

■ "새장 들어 새를 바꾼다" 구조조정 드라이브

왕양이 광둥성 서기 시절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던 정책이 '등롱환조(騰籠換鳥)'로 불리는 산업 구조조정이었습니다. 새장을 들어 새를 바꾼다는 '등롱환조'는 낙후 산업을 퇴출시키고 고부가가치 산업을 집중 육성한다는 전략으로 정책 효과가 실질적으로 일어나 광둥성은 현재 중국 첨단 산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광둥성의 성도 광저우시.〈사진=바이두 백과 캡처〉 광둥성의 성도 광저우시.〈사진=바이두 백과 캡처〉

공동부유와 '등롱환조'를 관통하는 사고는 당과 국가의 관리와 통제 아래에서의 경제 발전입니다. 거대한 새장을 만들어 새(주로 민영기업)들을 그 속에 가두어 키운다는 게 새장 경제관의 핵심입니다.

시진핑은 새 장 속에 새를 가두어 키우듯, 민영 기업들도 국가의 큰 틀 안에서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새를 위해 하는 일이 있다면, 그건 새장을 더 넓히는 일이죠. 주인이 원하는 새가 아니거나 주인 비위를 못 맞추는 새가 있다면 새장에서 내보내고 다른 새로 바꾸는 겁니다.

공동 부유를 큰 정책 기조로 삼아 선택과 집중할 산업을 고르고 이를 뒷받침하는 '등롱환조'를 통해 산업 구조조정의 가속 페달을 밟겠다는 메시지입니다.

왕양은 공청단 출신으로 후진타오 전 주석의 강력한 후견 덕을 봤지만 계파색이 옅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강력한 실무 추진 역량으로 파벌주의의 한계에 갇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지금 중국은 공부론과 선부론이 자리를 바꾸고 있는 시점입니다. 거대한 노선 전환이 시작되는 시점에 30년 전 선부론의 대부 덩샤오핑이 발탁한 인사가 출발선 앞에 섰습니다. 공동 부유의 앞날이 흥미진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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