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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6주년I왜,독일④] 일상에서 반성·추모…피해자들에게106조원 배상

입력 2021-08-18 16:04 수정 2021-08-20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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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8·15 광복 76주년입니다. 일본은 아직 책임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적극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움직임도 보입니다. 그래서 JTBC는 같은 전범국 독일을 다시 주목했습니다. 망각하는 국가와 반성하는 나라. 이 차이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걸까요. 저희 취재진이 독일 현지를 찾아 그동안 덜 알려진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관계자들을 만났습니다.〉

■ 베를린 한복판에 추모 공원 "일상에서 반성하고 추모"

베를린 중심가엔 전쟁 범죄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추모 공원이 있습니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파크'입니다. 면적만 약 1만9천㎡. 이곳엔 서로 크기가 다른 커다란 비석 2700여 개가 서 있습니다. 나치 피해자들을 상징합니다.

독일 수도 베를린 중심, 홀로코스트 메모리얼파크. 나치의 전쟁 범죄 피해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곳이다.독일 수도 베를린 중심, 홀로코스트 메모리얼파크. 나치의 전쟁 범죄 피해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곳이다.
들어가면 미로 같은 느낌입니다.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고립감이 커집니다. 하늘을 보면 마치 당시 희생자들의 괴로움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바깥소리도 잘 들리지 않아 더욱 집중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곳을 걸으며 희생자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또 추모합니다.

지하엔 박물관이 있습니다. 희생자 기억 공간엔 나라별로 희생자 숫자가 적혀 있습니다. 프랑스 76,100-77,100명, 네덜란드 100,000-102,000명, 루마니아 275,000-295,000명, 헝가리 270,000-300,000명… 국가마다 숫자는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있었을지 추정치일 뿐입니다. 숫자만으로도 당시 끔찍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파크 지하 박물관에 나라별 희생자 추정치가 적혀 있는 모습.홀로코스트 메모리얼파크 지하 박물관에 나라별 희생자 추정치가 적혀 있는 모습.
■ 희생자 600만명 이름 일일이 낭독


박물관 한편엔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공간이 있습니다. 나치에 희생당한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읊는 겁니다. 이곳에서 유대인들은 거대한 희생자 집단 속 이름 모를 한 명으로 기억되지 않았습니다. 이름은 무엇인지, 언제 태어났는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생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6백만 명 희생자 각자가 가지고 있었을 이야기를 차분하게 읽어줍니다. 이 모든 사연을 다 읽는 데 6년 하고도 7개월 27일이 걸린다고 합니다.


나치에 희생된 평범한 가족들의 이야기. 환하게 웃는 가족사진과 강제수용소의 잔혹한 모습이 함께 기록돼 있다. 나치에 희생된 평범한 가족들의 이야기. 환하게 웃는 가족사진과 강제수용소의 잔혹한 모습이 함께 기록돼 있다.
피해자 가족들 사연을 하나하나 기록한 공간도 있습니다. 평범했던 가정이 어떻게 파괴됐는지, 과정을 하나하나 기록했습니다. 밝게 웃는 가족사진과 강제수용소 모습이 교차하면서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전쟁 범죄가 얼마나 끔찍한지 다시금 깨닫게 해줬습니다.


나치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유대인 한 명이 직접 쓴 엽서.나치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유대인 한 명이 직접 쓴 엽서.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아, 아빠에게 편지를 써 보렴. 아마도 너희를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부디 신이 너희를 가엾게 여겨 주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내일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난단다. 눈물을 담아 너희를 안아주고 싶구나. 언젠가 꼭 너희를 다시 내 품에 안고 싶은데. 가여운 나의 아이들. 너희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것 같아.' (엽서 내용 한국어 번역)


■ 근처엔 유대인 박물관, 희생자 울음소리 상징 작품 눈길

이게 다가 아닙니다. 근처엔 유대인 박물관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 인근에서 태어난 유대인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가 설계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공백의 기억'입니다. 이스라엘 현대미술가 메나쉐 카디쉬만(Menashe Kadisgman)의 작품입니다. 사람 얼굴 모습을 한 금속 조형물들이 가득한 공간인데, 이곳을 걸어서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조형물들이 부딪히며 소리를 냅니다. 희생자들의 울음소리를 상징하는 겁니다.

취재진은 많은 관람객이 이곳에서 오랜 시간 머무르며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갓난아이와 함께 찾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독일 시민 스테파니는 "박물관 근처에 사는데 이번에 처음 왔다"며 "아기와 함께 와서 더 뜻깊다"고 말했습니다.

유대인 박물관 '공백의 기억'을 살펴보는 사람들의 모습.유대인 박물관 '공백의 기억'을 살펴보는 사람들의 모습.
이처럼 독일 곳곳엔 희생자를 기록하고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습니다. 일상에서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독일은 1996년, 국가 차원에서 '피해자 추모의 날'도 지정했습니다. 매년 1월 27일입니다.


■ 히틀러 벙커 자리엔 표지판만 덩그러니

이런 독일도 전혀 다르게 기억하는 곳이 있습니다. 히틀러 벙커입니다. 쉽게 말해 히틀러의 지하 집무실이었던 곳. 히틀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이기도 합니다.

취재진이 처음 도착했을 때 해당 위치가 어딘지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처럼 길을 헤매는 독일인들도 여럿 볼 수 있었습니다. 함께 스마트폰을 보며 "분명 이곳이 맞는데 어딘지 모르겠다"며 헤맸습니다. 그러기를 5분여. 작은 표지판 하나가 보였습니다. 아파트 단지 주차장 앞이었습니다.

히틀러 벙커 표지판. 독일 정부는 히틀러 벙커를 콘크리트로 덮어버리고, 작은 표지판 하나만 남겼다. 독재자의 끝이 얼마나 허무한지 보여주는 것이다.히틀러 벙커 표지판. 독일 정부는 히틀러 벙커를 콘크리트로 덮어버리고, 작은 표지판 하나만 남겼다. 독재자의 끝이 얼마나 허무한지 보여주는 것이다.
찾기 어려웠던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독일 정부는 히틀러 벙커를 콘크리트로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작은 표지판만 하나 남겼습니다. 독재자의 최후가 얼마나 허무했는지 보여주는 셈입니다. 이른바 '네오 나치' 세력은 이 벙커의 모습 이미지를 우상화한다고도 하니, 독일 정부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 피해자들에 100조원 넘게 배상


독일은 희생자 지원 사업에도 열심입니다. 직접적인 피해자 배상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1970년 당시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가 처음 무릎 꿇고 사과한 이후, 일관되게 이어져 온 정책입니다.


독일 정부는 지금까지 피해자들에게 수십조 원을 배상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국내 언론사가 보도한 배상 액수를 살펴봤더니 제각각이었습니다. 취재진이 독일 재무부 문건을 확인하고 주한 독일 대사관에 문의해봤습니다.

2020년 말 기준, 직간접 지급한 배상액은 약 790억 유로, 우리 돈 약 106조 원이었습니다. 대사관 측은 "다른 규정에 따른 기타 지급액 수십억 유로는 뺀 수치"라고 했습니다. 실제론 더 큰 금액을 썼다는 뜻입니다. 액수 자체도 크지만, 더 중요한 건 태도입니다. 수많은 희생자의 아픔은 돈으로 따질 수 없기에, 여전히 부족하다는 인식입니다.

독일 재무부의 홀로코스트 피해자 배상액 관련 문건. 지금까지 약 790억 유로, 우리 돈 약 106조 원을 배상했다고 기록돼 있다.독일 재무부의 홀로코스트 피해자 배상액 관련 문건. 지금까지 약 790억 유로, 우리 돈 약 106조 원을 배상했다고 기록돼 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은 다시 반복될 수 있다' 독일에서 자주 들은 말입니다. 끊임없이 과거를 기록하고 반성하는 이유일 겁니다. 메르켈 총리는 "역사적 책임은 독일의 존재 이유"라고 했습니다. 전범국 일본이 같은 전범국 독일을 보고 배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윤석·하혜빈 기자 americano@jtbc.co.kr

(제작지원 :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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