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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왜] 마오쩌둥처럼…'혁명 오너' 시대 과시한 시진핑

입력 2021-07-03 06:32 수정 2021-07-06 11:12

천안문 성루에서 신중국 선포한 마오쩌둥
시진핑, 인민복 입고 '마오 위에서' 연설

혁명 유산 상속한 태자당 출신 시진핑
"중국 건드리면 머리 깨져 피 흘릴 것"
'혁명 최대주주' 정체성으로 힘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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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성루에서 신중국 선포한 마오쩌둥
시진핑, 인민복 입고 '마오 위에서' 연설

혁명 유산 상속한 태자당 출신 시진핑
"중국 건드리면 머리 깨져 피 흘릴 것"
'혁명 최대주주' 정체성으로 힘자랑

1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당 관계자들이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창건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사진=EPA 연합뉴스〉1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당 관계자들이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창건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사진=EPA 연합뉴스〉


'인민복' '대만' '6·25'.
지난 1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렸죠. 중국공산당 100주년 행사를 관통하는 세 개의 코드 입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베이징 천안문 망루에 연회색 인민복을 입고 섰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공산당 창건 10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신화 연합뉴스〉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공산당 창건 10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신화 연합뉴스〉

이 드레스코드는 무슨 뜻일까요. 중국 지도자들은 인민복을 외교 행사 또는 군 사열 때 입곤합니다. 의상은 특정 장소와 결합할 때 힘을 증폭시켜 정치적 메시지를 발신합니다.

천안문 망루에 인민복을 입고 선다는 것은 1949년 10월 같은 장소에서 신중국을 선포한 마오쩌둥 이미지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시진핑도 자연스럽게 혁명 성취 이미지와 함께 공산당 집권 정당성의 세례를 받게 됩니다. 대중적 권력 기반을 다지기엔 그만인 드레스코듭니다.

아래 사진을 보실까요.
시진핑 주석이 후진타오 전 주석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있다. 〈사진=AP 연합뉴스〉시진핑 주석이 후진타오 전 주석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있다. 〈사진=AP 연합뉴스〉

정장을 입고 있는 후진타오 전 주석과 시진핑 주석의 위상을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후 전 주석은 상대적으로 위축돼 보이지 않은가요. 단순히 전현직간 절대적 권력비중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천안문 망루에서 드레스코드가 뿜어내는 위용 때문입니다.

특히 3연임 길까지 열어놓고 마오못지 않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있는 시진핑의 행보로 볼 때 망루에 선 시진핑과 후진타오의 투 샷은 오너와 전임 CEO의 관계를 연상시킵니다.

개혁·개방 초기 중공 8대 원로 가운데 한 사람인 천윈(陳雲)이 했다는 발언과 묘하게 겹쳐지는 사진입니다.

“이 강산이 누구의 것인가.”
“자식이 가장 믿을만 하다.”

혁명 주도층의 지분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발언이죠. 태자당의 모태이기도 합니다.

당초 태자당은 누군가 구심점으로 활동하며 사람들을 조직해서 등장한 게 아닙니다. 개혁·개방 초기 외자가 도입되면서 투자된 기업이 급성장하자 사업 확장하는 과정에서 대관업무를 뒤에서 도와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규제 당국에 네트워크를 가동해 인허가 문제를 풀어주던 일종의 로비스트들이었습니다.

물론 혁명 원로의 자녀들은 정관계에서 미래를 보장받으며 고속 승진하거나 최소한 안정된 직위를 이어갔습니다. 이 두 경로를 포괄하면서 무리를 형성한 사람들을 이른바 태자당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중국 공산당 창건 100주년 기념식 모습. 〈사진=AP 연합뉴스〉중국 공산당 창건 100주년 기념식 모습. 〈사진=AP 연합뉴스〉

덩샤오핑(鄧小平)이 지명한 장쩌민과 후진타오가 중국을 성장시켰지만, 대외관계는 상당히 조심스러웠습니다. 혁명 원로들과 태자당이 팔짱 끼고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색깔을 드러내기가 녹록지 않았을 겁니다.

태자당 출신들이 중국공산당의 핵심으로 진입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기에 장쩌민과 후진타오 시대는 일종의 전문경영자(CEO)들이 징검다리가 된 시간이었습니다.

마오쩌둥이 1949년 집권 이후 1976년 사망하기까지 권력을 쥐고 있었고 후계 그룹을 종종 바꾸면서 혹독하게 서로를 의심하고 경쟁하게 했습니다.

그 바람에 가신 그룹이었던 혁명 원로들은 숙청과 복귀를 반복하면서 자신의 안위조차 챙기지 못했습니다. 자녀들의 입신을 챙길 여력은 더더욱 없었던 거죠. 마오 사후 혁명 원로들에게 볕이 들었지만 자녀들에겐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인큐베이터 기간을 때워준 세대가 장쩌민과 후진타오 세대였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창건 10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신화 연합뉴스〉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창건 10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신화 연합뉴스〉

이제 징검다리를 다 건너고 혁명 원로들의 자녀들이 60대에 접어들자 오너십을 적극적으로 들고 나온 게 시진핑 시대입니다.

그만큼 마오에서 덩샤오핑으로 이어져 오던 혁명의 지재권에 대한 상속자라는 인식이 뚜렷합니다. 시진핑이 지난 1일 천안문 망루에서 했던 말입니다.

”누구라도 중국을 건드릴 망상을 한다면 14억 중국 인민이 피와 살로 쌓아 올린 강철 장성 앞에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릴 것입니다.“

이렇게 시진핑 주석의 발언이 종종 항일전쟁 시대에나 유행할 법한 '피해자 민족주의'와 '힘자랑' 서사를 띄는 것도 '혁명 최대 주주'라는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판단입니다.

이와 함께 천안문 망루는 시진핑에게 특별한 곳이기도 합니다. 신중국 건설 50주년 국경절 행사가 열린 1999년 10월 1일. 당시 푸젠성장 대리였던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이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이 특별한 장소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시중쉰은 공산당군 주력이 패주하여 저 멀리 쓰촨을 돌아 서북 지방 산시(陝西)성 옌안에 들어왔을 때 현지 책임자였습니다.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창건 100주년 기념식에서 오성홍기 게양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신화 연합뉴스〉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창건 100주년 기념식에서 오성홍기 게양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신화 연합뉴스〉

해방구 대부분이 무너진 가운데 험준한 지형 지물을 이용해 번듯하게 해방구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마오쩌둥에게 해갈의 단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국민당군에 몰린 공산당군의 패주로 지도. 공산당군이 승리하면서 이 여로는 대장정으로 포장됐다.               〈사진=소후닷컴 캡처〉국민당군에 몰린 공산당군의 패주로 지도. 공산당군이 승리하면서 이 여로는 대장정으로 포장됐다. 〈사진=소후닷컴 캡처〉
'서북왕'으로 불렸던 시중쉰.그는 덩샤오핑의 특급 수하로서 개혁·개방의 기관차였던 광둥(廣東)성 서기(정무 일인자)를 역임했고 부총리와 전인대 부위원장까지 지냈습니다. 한마디로 혁명 원로 중의 원로였습니다.

게다가 99년에는 덩샤오핑, 천윈, 펑전(彭眞) 등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8대 원로 가운데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서기의 아버지 보이보(薄一波)와 함께 당내에서 가장 원로로 대접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시중쉰은 노인성 치매를 앓고 있었죠.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운 노인이 국경절 행사에 참석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당 중앙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행여 사고라도 나면 행사가 난장판이 될 게 뻔했기 때문이죠.

당시 장쩌민(江澤民) 주석은 천안문 망루에서 시중쉰에게 다가가 안부를 챙겼습니다. 시중쉰은 장쩌민의 이름에 빗대 “인민이 곧 강산이고 강산이 곧 인민”이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아들 잘 봐달란 말이었겠죠. 시진핑은 이후 인사 규정 예외를 인정받으면서 초고속 승진해 대권을 거머쥐게 됩니다.

천안문 망루에서 인민복을 입은 시진핑의 코드가 감지되시나요? 대만과 6·25는 하편에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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