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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길 무단횡단 보행자 친 차주의 무죄주장…배심원 선택은

입력 2021-06-01 08:40 수정 2021-06-0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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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8월 30일 새벽 1시, 서울 강남구의 포스코 사거리. 한 승용차가 차로를 변경하던 중에 무단횡단을 하고 있던 보행자를 치는 사고를 냅니다. 보행자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치료를 받던 중 숨졌습니다.

승용차 운전자 30대 남성 권 모 씨는 교통사고특례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일반 국민의 시선에서 평가받고 싶다며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습니다. 어제(31일) 중앙지법 형사21-3부(장용범 마성영 김상연 부장판사)는 배심원들의 생각을 물었습니다.

중앙지방법원 전경중앙지방법원 전경

■ 비가 왔느냐, 안 왔느냐

쟁점으로 떠오른 건 날씨였습니다. 제한속도 위반 여부를 가르기 때문입니다. 사고가 난 도로는 제한속도가 시속 60㎞입니다. 검찰은 당시 비가 왔으니 20% 감속 의무가 있다는 것, 반면 "비가 안 왔다"는 게 권 씨 주장의 요지입니다.

검찰은 당시 CCTV에 찍힌 우산 쓴 행인들 모습이 찍혀 있고, 권 씨 본인이 조사 당시 비가 왔다고 진술한 것, 길바닥이 젖어 반짝거리는 것 등을 언급했습니다.

또 설령 비가 내리는 상태가 아니더라도 노면이 젖어있다면 20% 감속 의무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런데도 도로교통공단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권 씨가 70~72㎞ 속도로 달려 20㎞ 이상 과속했다는 것이 검찰 주장입니다.

하지만 권 씨 측은 "당시에는 비가 그친 지 3시간이 지나 감속 의무가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노면이 젖어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고 전날 밤부터 사고 발생 시점까지 강수량이 1㎜에 불과하다는 기상청 자료를 내놨습니다.

또 70~72㎞ 속도로 달렸다는 도로교통공단 분석과 달리, 강남경찰서는 권 씨가 사고 지점에서 58.8㎞로 달렸다는 분석을 했다고 했습니다.

■ 유난히 짙은 선…전조등은 고장

권 씨가 중고차로 산 이 승용차는 선팅이 유난히 짙었습니다. 또 왼쪽 전조등이 고장 난 상태였습니다.

검찰은 이런 차량 상태를 고려하면 권 씨가 더욱 안전운전을 할 의무가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권 씨의 운전 경력이 16년이 됐고, 이 차를 몬 지도 12년이 돼서 차의 상태를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권 씨가 전방주시 의무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게 검찰 주장입니다. 도로교통공단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권 씨는 차로를 변경할 당시 충분히 피해자를 인지할 수 있었는데도, 전방주시를 제대로 하지 않아 사고를 냈다는 것입니다.

또 권 씨가 사고 이후에도 제대로 구호 조치를 하지 않아 주변 행인들이 수습에 나서야 했다고도 덧붙였습니다.

반면 권 씨 측은 당시 우측 도로에서 택시가 크게 우회전하며 나오던 상황이라 방어운전을 위해 차로를 변경했고, 이 때문에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를 보던 중이었다고 했습니다. 차로 변경 이후에 피해자를 인지했다는 것입니다.

또 자동차 정지거리를 고려할 때, 권 씨가 모든 의무를 지켰더라도 피해자와 충돌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합니다. 1초 만에 브레이크를 밟아도, 무단횡단을 하던 피해자와는 부딪힐 수밖에 없던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권 씨의 변호인은 어린이 보호구역 비유를 들었습니다. 제한속도를 지켜 운행하더라도, 어린이가 갑자기 예상과 다르게 나와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는데 운전자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 유족 "운전자, 주의의무 다하지 않아"

피해자에게는 아내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검찰이 신청한 증인으로 법정에 나온 아내는 "사고 이후 3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지만, 가족 중에 누구 하나 제대로 사는 사람 없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권 씨가 아무런 사과도 없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배심원들과 재판부에 "깨진 전조등과 과도한 선팅으로 운행해서는 안 되는 차량이 과속으로 달려오고 있는 모습만 기억해달라"고 했습니다.

미국에 사는 피해자의 아버지도 비행기를 타고 와 법정에 섰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거짓말 한 번 하지 않는 아들이었다며 피해자를 회상했습니다. "운전자가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넘친다"며 "원한을 풀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권 씨는 피고인 신문 과정에서 피해자 유족에게 연락하지 못했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자신도 사고 충격으로 무섭고 두려워 6개월 정도 집에만 있었다고 했습니다. 거리를 걷다 건널목이 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사고 난다' '하지 말라' 등 소리치는 일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또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제대로 보상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유족을 찾아갈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 배심원, 만장일치 유죄

과속과 전방주시 의무. 권 씨는 자신의 과실 여부를 모두 다투는 상황입니다. 배심원은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요?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내렸습니다. 권 씨가 속도를 위반하고 전방주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본 것입니다. 배심원 중 2명은 금고 2년형, 5명은 금고 1년 6개월형 의견을 냈습니다. 권 씨가 제한속도보다 20㎞ 초과해 운행한 점이 가중요소로 반영된 것입니다.

재판부는 이들 평결을 받아들여 권 씨에게 금고 1년 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습니다. 야간에 9차로의 도로를 무단횡단한 피해자에게도 과실이 일부 있는 점, 권 씨가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점, 지인들이 선처를 탄원하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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