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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열린 강제징용 손배소 재판에 "창씨 등본 가져오라"는 일본 기업들

입력 2021-05-30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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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만에 열린 일본 기업 16곳 상대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     (서울=연합뉴스) 윤동진 기자 = 일제에 강제 징용된 노동자들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국내 법원에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의 첫 변론 기일이 열린 28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소송을 낸 당사자들이 재판이 끝난 후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1.5.28     mo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6년 만에 열린 일본 기업 16곳 상대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 (서울=연합뉴스) 윤동진 기자 = 일제에 강제 징용된 노동자들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국내 법원에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의 첫 변론 기일이 열린 28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소송을 낸 당사자들이 재판이 끝난 후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1.5.28 mo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은 20건이 넘습니다. 지난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일본 기업들에 손해 배상 책임이 있다고 인정한 뒤 소송 제기가 급격히 늘었습니다.
지난주 중앙지법에선 이와 같은 손해배상청구소송 5건의 변론 기일이 열렸습니다. 사건마다 일본 기업들의 대응은 비슷합니다.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가 실제로 강제징용을 당한 사람이 맞는지 본인 스스로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창씨 등본 필요"
지난 25일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 고 모 씨 등이 일본 제철을 상대로 낸 소송의 변론기일에서 일본 제철은 '제적등본'을 요구했습니다. 고 씨 등을 대리하는 전범진 변호사는 "창씨명이 있는 제적등본을 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일본 기업들이 가진 기록에는 피해자들이 창씨명으로 기록돼있으니, 실제 피해자라면 해당 이름이 적힌 등본으로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70~80년 전, 너무 오래된 일이라 피해자들이 기록들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운 좋게 등본 등 당시 기록을 갖고 있다 해도, 일본 기업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이름의 한자에 점이 하나라도 더 찍혀있다면 "강제징용 피해자와 동일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당시 면서기 등이 발음이 같은 다른 한자를 잘못 기록하는 일은 적지 않게 일어났는데, 이 '오기'를 물고 늘어지면 다시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합니다.

70~80년 전 일이다 보니 기록도 불완전한 데다 입증은 더더욱 어려운 상황. 원고들은 당시 일본에 끌려간 상황을 가족들이 진술한 기록이나, 과거 정부가 피해자들을 조사했던 기록 등을 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상황과 맥락 속에서 피해 사실을 인정해 달라는 취지입니다.


◇"자발적인 취직"
당시 일본 기업에 취직해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정 모 씨 등이 일본 제철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나오는 주장입니다.
정 씨는 1938년 총동원령에 따라 일본 해군 군속(군무원)에 동원됐다가, 몇 년 뒤 일본 제철에 강제징용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 제철 측은 그사이 일본에서 자유롭게 일하다가 취직한 것이 아니냐고 주장합니다. 당시 한국에 있던 아내가 일본에 건너와 자녀를 출산한 것에 대해서도, 일본 제철 측은 "자유로운 상황이었다"는 주장으로 이어갑니다. 하지만 정 씨 측은 이미 해군 군속으로 강제 동원돼 있던 상태에서 내각의 명령에 따라 일본 제철로 이직해 강제징용된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 때 그 기업이 아니다"
당시 기업과 현재 기업은 '법인격'이 다르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주로 이 주장을 펼치는 건 미쓰비시인데요. 일제강점기 미쓰비시와 현재 미쓰비시 계열사들은 '이름만 같을 뿐' 별개의 회사라는 게 요지입니다. '옛 미쓰비시'는 전쟁이 끝난 후 해산됐고, 채무도 이어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법원이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선례도 있습니다.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 모 씨 등 4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입니다. 지난 2017년 광주지법 민사11부는 "옛 미쓰비시중공업과 현재 미쓰비시중공업은 실질에 있어 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서 동일한 회사로 평가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미쓰비시중공업 측은 항소했지만 기각됐고, 현재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배상청구권 없다"
지난 4월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이 각하된 것을 들어 "배상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이어가는 기업들도 있습니다. 재판부는 '한 나라의 주권적 행위는 다른 나라에서 재판받지 않는다'는 주권 면제 원칙을 인정했습니다. 또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등 권리구제수단이 마련됐다는 이유 등을 들어 각하했습니다.

강제징용 피해자 이 모 씨 등 5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미쓰비시 측은 최근 이 '각하' 판결문을 재판부에 제출했습니다. 또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이 소멸했다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인 반면,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이라 '주권 면제' 원칙을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또 지난 2012년과 2018년 대법원은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두 차례나 인정한 바 있습니다.


◇첫 대규모 소송 결론
지난주 중앙지법에서 변론 기일이 열린 사건 5건 중 가장 피해자 규모가 큰 사건의 결론이 조만간 나옵니다. 강제징용 피해자 송모 씨 등 85명이 일본 제철, 미쓰비시 광업, 닛산 화학, 니시마츠 건설 등 16개 기업을 상대로 낸 소송의 결론이 다음 달 10일 나옵니다.

지난 2015년 제기된 소송이지만, 일본 기업들이 '무대응'으로 일관해 법원의 공시송달 끝에 6년 만에 재판이 열린 사건입니다. 지난 28일 열린 첫 변론기일에서 재판부는 "법리와 사실관계가 어느 정도 정리됐다"고 보고 선고 기일을 잡았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유족과 당사자들은 법정을 메운 일본 기업 측 변호인들을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선친들이 얼마나 고생했는데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일본 기업을 변호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으냐"는 취지입니다. 주로 변호를 맡은 김앤장과 태평양, 광장의 이름을 큰소리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또 유족들은 이날 재판에서 일본 기업들이 선고를 미루고 조금 더 심리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한 것을 두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장덕환 일제 강제노역피해자 정의구현 전국연합회 회장은 "소송을 낸 뒤 돌아가신 분만 10여 명"이라며 "오랜 시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던 일본 기업들이 갑자기 선고를 연기해달라고 하는 건 옳지 않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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