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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만 보는 휠체어 공간' 차별 판결…그들이 반쪽짜리라 주장하는 이유

입력 2021-04-02 16:06 수정 2021-04-02 16:12

대법 "정면 못 본 휠체어, 장애인 차별"
"고의·과실은 없었다"…원고 측, 유감 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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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정면 못 본 휠체어, 장애인 차별"
"고의·과실은 없었다"…원고 측, 유감 표명

지체 장애인 김영수 씨는 평소 버스를 잘 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버스를 타고내리기 쉽지 않고, 막상 버스에 탑승해도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김씨는 6년 전 어느 날 경기도 2층 광역버스를 탔습니다. 수동식 경사로에, 휠체어 전용공간이 마련돼 장애인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단 설명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버스 문이 열리자, 김씨는 당황했습니다. 휠체어 전용공간이 다른 좌석과 달리 정면이 아닌 측면을 바라보는 구조로 설계돼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면 못 보는 휠체어 전용공간' 소송 당사자 김영수 씨 [JTBC 뉴스룸 캡처]'정면 못 보는 휠체어 전용공간' 소송 당사자 김영수 씨 [JTBC 뉴스룸 캡처]
"똑같은 사람인데, 단지 몸이 불편하단 이유로 타인의 시선을 집중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모멸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혼자만 돌아앉은 김씨는 다른 승객들의 시선을 받아야 했습니다. 공간 자체도 좁아 휠체어가 통로까지 튀어나왔고, 오가는 승객들의 발에 걸리는 등 불편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김씨는 차별을 당했다며 버스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 관련 리포트
좁은 휠체어 공간, 옆만 보고 다닌 장애인들…"차별 맞다"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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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998736

◇ 대법 "차별 맞다" 결론…'차별 구제' 첫 인정

대법원 1부(주심 이기택 대법관)는 전날(1일)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다른 승객들과 달리 옆만 바라보고 가도록 한 버스 구조는 차별이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현행법상 기준과 문제 된 버스의 '휠체어 전용공간' 비교 [JTBC 뉴스룸 캡처]현행법상 기준과 문제 된 버스의 '휠체어 전용공간' 비교 [JTBC 뉴스룸 캡처]
정면을 기준으로 한 휠체어 전용공간을 마련하라는 원심판결도 확정했습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48조에 명시된 적극적인 '구제 조치'를 대법원이 최초로 인정한 유의미한 판단입니다.

◆ 관련 리포트
'차별 구제' 법까지 만들었지만 '법원 문턱'만 가면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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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998737

◇ "고의·과실 없었다" 위자료는 기각

이와 함께 대법원은 원심에서 인정한 '위자료 30만원' 지급 명령 부분을 파기해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재판부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버스 회사에 고의나 과실이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휠체어 전용공간이 정면을 기준으로 한다는 규정이 명확하지 않은 점
▲지자체가 버스 회사에 휠체어 전용공간이 기준에 미달한다고 지적한 바 없는 점

◇ 원고 측 "반쪽짜리 판결"

김씨와 함께 소송을 제기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대법원의 결정이 '반쪽짜리 판결'이라며 유감을 표했습니다. 단순히 '위자료 30만원'이 아쉬워서가 아닙니다.

김강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정책국장은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잘못 지시해서 버스 회사가 따른 것이라면 버스 회사에 과실이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소극적인 지자체의 행동이 과실이 없다는 근거로 활용된 건 납득하기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지자체가 모든 사안을 일일이 감독하고 지적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지자체의 지적 여부가 고의·과실 판단의 근거가 된 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원고 측 법률대리인 윤정노 변호사(법무법인 태평양) 역시 판결에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윤 변호사는 "단 한 번이라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과 (버스 탑승 시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해봤다면 이런 구조가 도저히 나올 수 없다"며 "그런 고려를 하지 않았다면 과실이 인정돼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2017년 9월 22일 문제 된 버스 차고지에서 이뤄졌던 서울고법 현장검증 상황 [JTBC 뉴스룸 캡처]2017년 9월 22일 문제 된 버스 차고지에서 이뤄졌던 서울고법 현장검증 상황 [JTBC 뉴스룸 캡처]
버스 회사의 입증 책임을 엄격히 보지 않은 점도 지적했습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차별행위를 한 사람이 차별행위의 고의·과실이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일반 민사사건과는 달리 원고가 아닌 피고에 입증 책임을 둔 겁니다.

윤 변호사는 "버스 회사가 고의·과실이 없다고 충분히 입증해냈다기보다, 전반적인 사정을 비춰보면 버스 회사에 과실이 없는 것 아니냐는 취지로 대법원이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김 국장은 차별행위를 인정하고 적극적 시정 조치까지 명하면서 고의·과실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법리적으로 모순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좌석 수를 늘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휠체어 전용공간을 규격과 다르게 설치했거나 적어도 원고가 정상적으로 버스를 이용하지 못하게 한 것에 과실은 인정되었어야 할 것"이라 강조했습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장애인 차별행위의 고의·과실의 입증 책임에 관한 법리를 잘못 해석해 적용한 점에 대해 파기환송심에서 다시 한번 다툴 것"이라 밝혔습니다.

◇ "장애인의 시각에서 봐달라"

문제가 된 버스는 해외에서 주문 제작해 들여온 2층 광역버스였습니다. 김씨는 "버스 도입 전에 먼저 중증 장애인들을 참여시켜서 휠체어 전용공간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면, 버스 회사가 이중으로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 했습니다.

비장애인들이 '우리가 이렇게 해주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실수라고도 말했습니다. 장애인의 시각에서 봐달라는 것입니다.

문제 된 버스의 휠체어 전용공간 모습 [JTBC 뉴스룸 캡처]문제 된 버스의 휠체어 전용공간 모습 [JTBC 뉴스룸 캡처]
국가인권위원회의 〈2019 장애인 인권증진을 위한 실태조사〉에서 복수응답을 받아 조사한 결과 장애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은 '장애인 콜택시(64.5%)'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다음은 '지하철(43.7%)'이었습니다. 교통약자를 위한 저상버스를 이용한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전체의 12.3% 수준이었습니다.

저상버스를 타지 않는 이유로는 '저상버스 배차 간격이 너무 길다(31.1%)'는 답변이 가장 많았습니다. '다른 승객들이나 운전기사의 시선이 불편하다' '내가 이용하는 노선에 저상버스가 없다'는 등의 이유가 뒤따랐습니다. 버스를 잘 타지 않는다는 김씨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대법원은 판결을 통해 '정면을 기준으로 휠체어 전용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앞으로는 장애인이란 이유로 버스에서 다른 이들과 다른 방향을 보고 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번 판결과 관련해 김씨는 이렇게 소회를 밝혔습니다.

"지하철이 안 가는 곳도 버스는 갑니다. 비장애인하고 동등하게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가장 기쁩니다"

김씨와 인터뷰를 하면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한 마디가 있습니다. "이동권은 다른 말로 생명권"이라는 말입니다. '이동'은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라는 뜻입니다. 김씨를 비롯한 모든 장애인이 이 기본적인 권리를 행사하는 데 불안하거나 불편하지 않은 사회가 오길 기대합니다. 버스를 잘 타지 않는다던 김씨가 하루라도 빨리 버스를 타고 이곳저곳 여행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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