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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취재]'들을 수 있다'냐 '들어야 한다'냐…경찰ㆍ지자체 갈등.txt

입력 2021-03-31 16:26 수정 2021-03-31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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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수 있다'와 '들어야 한다'.

다섯 글자를 두고 전국 곳곳에서 광역자치단체와 경찰이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오는 7월 자치경찰제 전면 시행을 앞두고 지역마다 조례를 만들어야 하는데, 자치경찰의 사무 범위와 관련한 규정을 두고 양측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겁니다. 충북에선 갈등이 커지며 현직 경찰관들이 도청 앞에서 1인 시위에 나섰고, 31일부터 다음 달 27일까지 집회 신고도 냈습니다. 현직 경찰관의 집회 신고는 경찰청 창설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또 서울에서도 경찰관들이 31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시를 규탄했습니다.
 
29일 충북도청 앞에서 청주 상당경찰서 직장협의회 관계자가 자치경찰제 운영 조례안에 항의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앞서 충북도는 자치경찰의 사무 범위와 관련한 조항을 개정할 때 지방경찰청장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부분을 '들을 수 있다'로 바꿔 조례안 입법을 예고했다. 연합뉴스29일 충북도청 앞에서 청주 상당경찰서 직장협의회 관계자가 자치경찰제 운영 조례안에 항의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앞서 충북도는 자치경찰의 사무 범위와 관련한 조항을 개정할 때 지방경찰청장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부분을 '들을 수 있다'로 바꿔 조례안 입법을 예고했다. 연합뉴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자치경찰들의 사무 범위에 대한 내용입니다. 경찰청은 전국 광역자치단체에서 참고할 수 있도록 표준 조례안을 내놓으며 "생활안전ㆍ교통ㆍ경비 관련 자치경찰 사무의 구체적 사항 및 범위와 관련해 광역경찰청장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2조 2항)고 명시했습니다.

자치경찰제가 시행되면 기존에 하지 않던 일까지 추가로 떠맡게 돼 본연의 역할인 치안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진 않을지 우려하는 경찰관들이 많기 때문에, 광역자치단체가 사무 범위를 조정하거나 새로운 일을 시킬 때는 해당 지역 경찰청장과 '반드시' 협의를 거치도록 한 겁니다. 이에 따라 부산ㆍ인천ㆍ대전ㆍ충남 등은 '들어야 한다' 혹은 '협의하여야 한다', '청취하여야 한다'는 내용으로 이미 조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광역자치단체는 이를 "광역경찰청장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로 바꾼 조례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들어야 한다'고 강제하면 자치권 침해 소지가 커 지방 자치의 본질에 어긋난다는 게 이유입니다. 대표적으로 서울과 충북 등이 '들을 수 있다'로 내용을 바꿔 입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경기 역시 같은 입장이었지만, 최근 경찰 측 의견을 받아들여 '들어야 한다'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상황입니다.

 
서울경찰 직장협의회 대표단이 31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7월부터 전면 시행되는 자치경찰제 관련 서울시 조례안에 대해 비판했다. 이들은 "지방자치단체 업무가 경찰로 전가될 우려가 있다"며 수정을 촉구했다. 연합뉴스서울경찰 직장협의회 대표단이 31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7월부터 전면 시행되는 자치경찰제 관련 서울시 조례안에 대해 비판했다. 이들은 "지방자치단체 업무가 경찰로 전가될 우려가 있다"며 수정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충북도청 앞에서 경찰들이 1인 시위에 나서고,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건 이 때문입니다. 사무 범위를 조정하려면 반드시 사전에 협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국 경찰공무원직장협의회 관계자는 "사실 '들어야 한다'는 것도, 의견을 듣기만 하고 결정은 광역자치단체가 내릴 수 있는 데다 처벌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강제 규정'이 아닌데, 이마저도 거부하는 것"이라며 "광역자치단체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도록 견제하고, 치안 외 업무를 무분별하게 시키거나 업무량이 지나치게 늘어나지 않도록 막으려면 꼭 '들어야 한다'라는 내용으로 입법이 되어야 한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말했습니다.

논란을 낳는 규정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충북의 경우 지자체 예산을 활용한 복지 지원 대상을 '자치경찰위원회 사무국 소속 경찰 공무원'으로 한정하고 있어, 경찰이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사무국 소속뿐 아니라 일선 현장 경찰관들에 대해서도 복지 지원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는 겁니다. 서울의 경우 "자치경찰사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에게 예산의 범위에서 복지, 처우 등의 지원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긴 하지만, 실제 서울시 소속 공무원과 비슷한 수준의 복지 혜택을 줄지는 미지수입니다. 경찰은 지원 범위를 모든 자치경찰로 확대하고 실제 지원도 이뤄져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지자체는 재정 부담이 커지는 건 곤란하다는 입장입니다.

서울과 충북에선 양측 입장이 팽팽하기 때문에,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달 말까지는 조례 제정을 마쳐야 최소한의 시범 운영 기간을 가질 수 있어, 입법을 계속 미룰 수만도 없습니다. 결국 각 광역자치단체와 해당 지역 경찰이 적절한 합의점을 찾아내야 하고, 찾아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의 모습. 연합뉴스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의 모습. 연합뉴스
다만 경찰 일각에선 "조례 내용에 대한 갈등은 문제의 시작일 뿐"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경찰공무원직장협의회 관계자는 "지금 논란이 되는 조항 외에도 자치경찰제 관련 법에 모호하고 불분명한 부분이 너무 많다"며 "시범 운영을 시작하면 당장 문제들이 터져 나오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부분들이 수정되고 명확해질 때까지, 계속 문제를 제기하고 목소리를 내겠다"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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