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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의 뒤편...3km와 1km의 차이가 뭐길래

입력 2021-02-17 10:32

치솟은 계란값의 원인이자 변수...기준 완화에 양계농가 그나마 숨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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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솟은 계란값의 원인이자 변수...기준 완화에 양계농가 그나마 숨통

며칠 전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요새 계란값 너무 비싸더라. 왜 이렇게 비싸대?"
얼마 전부터 농림축산식품부 취재를 담당해온 며느리는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그게요. 조류인플루엔자(AI)가 곳곳에 발생했는데 그 예방을 위해 AI 발생 농가 주변에 있는 농가의 닭까지 미리 살처분해서 닭과 계란 공급이 줄었거든요...'
하지만 뒷말은 속으로 삼켰습니다. 시어머니께서 자세한 설명을 원하시는 것 같진 않았거든요. 그래서 대신 이렇게 맞장구만 쳤습니다.
"그러게요. 계란 한 판(30개)에 7000원, 8000원, 막 이렇더라고요?"
"맞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4000원이더니."
"그래서 정부가 미국산 계란까지 수입했잖아요."
"그래? 난 아직 못 봤는데. 근데, 그거 먹어도 된다니?"

독자님들도 최근 이런 비슷한 대화를 나누신 적, 있으시죠? 꼭 이런 내용은 아니더라도 요새 계란값이 금값이라는 말, 들어보셨을 겁니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작년 2월 5184원이었던 특란 한 판(30개)이 2월 10일 기준 7481원입니다. 평년에 비해 40.3% 오른 겁니다.

정부는 계란값을 잡겠다고 지난달 25일부터 미국산 계란까지 수입했죠. 농식품부 산하기관인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직접 판매에 나서기까지했습니다. 그 결과 농식품부는 2월 10일까지 총 계란 2,835만개(수입 신선란 1,505, 가공용 1,150, 비축 180 등)을 시중에 공급했다고 밝혔습니다.
미국산 계란이 지난 7일 서울 한 대형마트에서 판매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산 계란이 지난 7일 서울 한 대형마트에서 판매되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서인지 초기엔 보기 힘들던 미국산 계란이 우리 곁에 부쩍 다가온 느낌입니다. 주부들 사이에선 '미국산 계란을 대형 마트에서 봤다', '미국산 계란을 먹어보니 국산과 노른자색 차이가 있다. 맛 차이는 잘 모르겠더라' 같은 경험담이 종종 화제에 오릅니다.

수입 계란은 앞으로 더 많아질 예정입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지속적인 가격 상승에 대비해 설 이후에도, 2.15~18일까지 약 500만개, 2월말까지 2,400만개의 신선란을 수입할 예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계란 수입조치에도 계란 가격이 쉽게 내려가지 않고 있습니다. 도대체 원인이 뭘까요?

그건 바로 국내 생산량 감소 폭이 지나치게 큰 탓입니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15일 자정 기준 2419만8000마리의 닭이 조류인플루엔자(AI) 예방 등의 목적으로 살처분 조치됐습니다. 이중 계란을 생산하는 산란계가 1511만1000마리(62.4%)를 차지합니다.
AI 확진 농장 반경 3㎞ 이내에 위치한 산란계 농장의 계란 출하가 금지된 점도 계란값 상승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상황에 애써 키운 닭과 계란을 땅에 묻어야했던 양계농가들은 참담해했습니다.
대한양계협회 김동진 홍보국장은 얼마 전 기자에게 말했습니다.
"계란 가격 상승은 바로 정부가 AI 발생농장 주변 3km 이내에서 무차별적인 살처분 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양계협회는 이런 상황을 우려해 수차례에 걸쳐 정부에 살처분 정책을 재고해달라고 요청했는데도 AI확산 방지 차원이라는 이유로 무시해버렸다."

양계협회에선 앞서 이런 성명도 냈습니다.
"외국산 계란 수입은 방역정책 실패를 농가와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파렴치한 행위다. 살처분 당한 농가는 쥐꼬리만한 보상금으로 재기 불가능한 상황이고 국민들이 코로나 19로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닭고기, 계란값 폭등이라는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 몫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익명을 요구한 양계 농가의 주인은 기자에게 더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솔직히 계란값 부담이 커진 소비자들을 생각하면 일부 계란 수입은 필요했을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한국 양계농가엔 너무 가혹하고 엉뚱하게 외국산 수입에만 신경쓰고 있어요. 2017년 (AI 파동으로) 미국산, 태국산 계란이 수입됐을 땐 우리 계란이 관리가 잘 되지 않았던 면도 있었기에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우리 양계업자들은 AI를 막기 위해 많은 투자를 했어요. 살충제 계란 논란도 터지면서 계란 품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죠. 그런데 과도한 살처분 기준을 유지해서 우리만 죽어나요."

또다른 양계업 관계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에는 AI 발생 농가 반경 500m까지만 예방적 살처분 대상이었는데 정부가 2018년 3km로 과도하게 기준을 올렸습니다. 그런 과도한 기준을 가진 나라가 많지 않아요. 음성 판정을 받았는데도 예방 목적을 이유로 애써 키운 닭을 땅에 묻어야하는 기분은 아마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

일부 양계농가 주인은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반경 3km에 있는 닭을 다 살처분하는 과도한 규정을 수정해달라"는 청원도 잇따라 올렸습니다. 살처분을 거부하며 행정심판을 청구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런 애타는 목소리에 드디어 화답한 것일까요.
농식품부가 그저께(15일) 살처분 범위를 조정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AI 발생에 따른 예방적 살처분 기준을 기존 발생농장 반경 3km 이내의 모든 가금류에서 1km 이내의 동일 가금류로 변경하겠다는 겁니다. 기존에는 닭을 키우는 농장에서 AI가 발생했을 때 3km이내의 모든 가금류가 살처분됐다면 이제는 1km 이내에 있는 닭만 살처분 됩니다. 일단 이날부터 앞으로 2주간 적용합니다. 이 조치를 연장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변경에 대해 농식품부는 "최근 AI 확산세가 다소 꺾인 점 등을 감안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좀 늦었다는 평가를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살처분 반경을 더 일찍 줄여야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거죠. 하지만 농식품부는 "백신은 한계가 있었고 올해 사상 유례 없이 고병원성이 검출돼 기존 예방적 살처분 조치는 적절한 조치였다"고 말합니다. 양계협회측은 살처분 기준 변화를 반기면서도 "농가들이 과거와 달리 방역을 철저히 하니 사실 반경 1km 기준을 반경 500m로 더 낮춰도 된다"는 입장입니다.

자, 어찌됐든 "과도한 조치"가 조금은 바뀌었으니 계란값은 내릴까요? 양계업계는 계란 값이 정상화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전망합니다.
통상적으로 산란계를 살처분한 뒤 병아리부터 길러 계란을 생산하려면 6~8개월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어찌됐든 앞으로는 조류인플루엔자와 정부 정책 때문에 양계농가들이 눈물 흘리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살처분 보상금과 생계 지원금 문제도 해결돼야 할 겁니다.

3km에서 1km로. 잘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숫자가 3에서 1로 바뀐 정도 같지만 양계농가들에게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그나마 긍정적인 변화입니다.

정부가 내놓는 정책 한 줄, 수치 하나가, 관련 당사자들에게는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는 걸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우리 식탁에 오르는 계란에는 이런 뒷얘기가 숨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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