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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는 '눈' 잃었는데…업체 책임자들은 '실형' 피했다

입력 2021-02-12 19:32 수정 2021-02-14 23:25

피해자 5명 9~10억 원 배상받아'메탄올 실명' 사건, 민·형사 판결문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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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5명 9~10억 원 배상받아'메탄올 실명' 사건, 민·형사 판결문 분석

2016년 휴대폰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던 파견 노동자들이 메탄올에 중독돼 시력을 잃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메탄올 실명'은 전 세계에서도 1960년대를 마지막으로 보고된 적이 없는 산업재해입니다. 반세기 흘러 한국에서 다시 일어난 겁니다.

 
노동자는 '눈' 잃었는데…업체 책임자들은 '실형' 피했다
"저희 피해자들은 가족과 같이 살고 있는데요. 가족 얼굴을 못 보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가족 얼굴 제대로 보고 싶어요"

2017년 12월 국회 기자회견에 참석한 피해자 이모 씨는 흐느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씨를 포함해 이 사건으로 실명한 노동자 5명은 손해배상 소송을 냈습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8부와 민사합의42부에서 재판이 진행됐고, 지난해 8월과 지난 4일 1심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법원은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5명에게 각 9~10억 원씩 손해배상을 하라고 판결했습니다.

JTBC 취재진은 손해배상(민사) 판결문과 가해자들의 형사 재판 판결문을 각각 살펴봤습니다.

◆ 관련 리포트
'메탄올 중독'으로 실명…법원 "노동자들에 30억 배상"
→ 기사 바로가기
https://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992066

◇ 피해자는 '3차 하청업체' 노동자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해 노동자들을 "고용계약 체결 후 사업장에 파견된 노동자"라고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해 파견업체인 A 회사에 고용된 뒤, 제조업체인 B 회사에 파견된 직원이란 의미입니다. 피해자들은 각기 다른 고용 형태에 따라 파견업체 3곳과 제조업체 3곳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습니다.

"삼성전자·LG전자 → 1차 하청업체 → 2차 하청업체 → 3차 하청업체"

이들이 근무한 제조업체는 삼성전자와 LG전자 스마트폰 테두리·버튼 등을 만들어 2차 하청업체에 납품하는 곳이었습니다. 하청의 재하청, 그리고 다시 한번 하청을 받은 업체인 겁니다.

피해자들은 불법 파견된 노동자들이었습니다. 현행법상 제조업체 직접 생산공정 업무엔 노동자 파견이 금지돼 있습니다. 파견돼선 안 되는 업무에 파견돼 일한 겁니다.

"근로자파견사업은 제조업의 직접생산공정업무를 제외하고 전문지식ㆍ기술ㆍ경험 또는 업무의 성질 등을 고려해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업무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업무를 대상으로 한다"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5조-

위험은 영세업체로 외주화된 반면 관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메탄올에 직접 노출되는 일이었지만 업체는 배기장치를 설치하지 않았고, 마스크 등 보호장구 역시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노동자들이 다단계 하청과 제조업 불법 파견의 가장 아래 단계에서 겪는 위험을 적나라하게 보여줬습니다.

◇ 가해 기업 "동료 도와주다 노출…피해자 과실"

재판 과정에서 가해 기업들은 "피해자들에게도 과실이 있으므로 본인들의 책임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부 기업은 피해자의 질병이 '개인의 특수한 체질' 때문이라고도 말했습니다.

가해 기업들의 주장을 더 살펴보면, 피해자 이씨에 대해선 "평소 업무 후에 시간이 남으면 친한 생산직원들의 업무를 도와주곤 했다"며 "그 과정에서 작업이 미숙해 메탄올에 노출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관리자의 지시가 없었는데도 자발적으로 동료를 도와주다 메탄올에 노출됐으니 피해자에게도 상당한 과실이 있다는 겁니다. 이씨는 기준치의 11배가 넘는 메탄올이 검출된 작업장에서 일했습니다.

이씨와 같은 사업장에서 일했던 방모 씨에 관해선 "작업을 하던 중 무의식적으로 눈을 손으로 비비는 행동을 했거나 에어건을 들고 장난을 치는 등의 행동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이같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들이 취급하는 물질이 메탄올이란 사실조차 고지받지 못한 점
▲가해 기업들이 작업의 위험성에 대해 알리거나 적정한 보호 장비를 지급하지 않았던 점
▲질병이 특이체질에서 기인했다고 보기 어려운 점
▲피해자들이 이상 행동을 했다는 자료가 없는 점입니다.

◇ 실형은 '0명'

파견·하청업체는 민사상 책임을 물게 됐습니다. 그러나 형사 재판은 달랐습니다. 집행유예나 벌금형에 그쳤을 뿐, 모두 실형을 피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사진=연합뉴스
먼저 하청업체 관계자들을 살펴보면, 인천지법 부천지원 형사4단독 류준구 판사는 2017년 산업안전보건법과 파견근로자보호법 위반으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A씨는 피해자 이씨와 방씨가 일했던 제조업체를 실질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재판부는 "젊은 노동자들이 메탄올 과다 노출로 실명에 가까운 심각한 시각 장해 등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며 "죄질이 상당히 나쁘고, 발생한 결과가 매우 중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도 A씨가 자백을 했고 진지하게 반성을 했던 점 등을 유리한 정상으로 봤습니다.

"단속 전까지는 메탄올의 위해성이나 취해야 할 조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도 피해회복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A씨 판결문 중-

또 다른 제조업체를 운영했던 B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천지법 형사10단독 이재환 판사는 같은 해 B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파견 근로자들의 열악한 근로 환경에 대한 경종을 울릴 필요성이 있다"면서도 "B씨가 메탄올의 위험성에 대해 온전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피고인에게 실형을 선고해 곧바로 사회와 격리시키는 것보다는 사회 속에서 근로자들에 대한 피해 회복에 힘쓸 수 있도록 형을 정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B씨 판결문 중-

불법 파견업체 관계자 대부분은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한 파견업체 대표이사 C씨는 2016년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인천지법 부천지원 형사2단독 김정태 판사는 "C씨가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경미한 벌금형의 전과만 1회 있다"고 판시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형사 재판은 모두 검찰·피고인 양측의 항소 없이 1심에서 형이 확정됐습니다. 결국 시력을 잃은 피해자는 있지만, 감옥에 간 가해자는 없게 됐습니다.

정우준 노동건강연대 활동가는 "업체가 거짓말을 한 부분들이 분명함에도 실형을 피했다"며 "산업재해에 대한 사법부나 사회의 인식이 아직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지적했습니다.

◇ 원청·국가엔 책임도 못 물어

근무 3주 만에 시력을 잃은 피해자 김모 씨는 2017년 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35차 UN 인권이사회에 섰습니다.

 
노동자는 '눈' 잃었는데…업체 책임자들은 '실형' 피했다
"한국에는 저처럼 시력을 잃은 젊은 노동자들이 최소 5명이 더 있습니다. 많은 분이 삼성이나 LG 휴대폰을 갖고 계실 겁니다. 저는 당신들의 휴대폰을 만들다가 시력을 잃고 뇌 손상을 입었습니다. 일회용 컵처럼 사용되다가 버려졌습니다"

김씨는 한국 정부와 삼성전자·LG전자가 책임을 질 것을 호소했습니다. 앞서 살펴본 파견 구조를 다시 살펴볼까요.

"삼성전자·LG전자 → 1차 하청업체 → 2차 하청업체 → 3차 하청업체"

이 사건 민·형사 소송 대상은 모두 불법 파견업체와 3차 하청업체 관계자들이었습니다. 1·2차 하청업체는 물론 원사업자인 대기업의 책임은 그 어디에서도 묻지 못했습니다.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을 대리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류하경 변호사는 원청 사용자 및 정부에 책임을 묻지 못한 점을 한계로 꼽았습니다. 류 변호사는 "메탄올 사용 여부를 조사한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제조업체의 말만 믿고 돌아갔다"며 "공장을 조사하는 등 근로 감독을 철저히 했더라면 예방이 가능했던 사건"이라 설명했습니다.

피해자들은 UN 인권이사회와 국회 등에서 수년 동안 목소리를 내왔습니다. 하지만 손해배상 판결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소회를 묻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들을 지원해온 노동건강연대는 취재 기자에게 "피해자들이 현재 생활에 집중하고 싶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전했다고 말했습니다. 또 피해자들은 가족과 함께 일상으로 돌아가거나 여전히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피해자들은 5년간의 법정 투쟁 끝에 사업주들에게 책임을 묻게 됐습니다. 고용노동부는 2015년 국내 주요 공단에 있는 공장 10곳 중 3곳이 불법 파견 노동자를 쓰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제조업 불법 파견'과 관련된 사건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청과 파견이란 노동계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제2, 제3의 메탄올 실명'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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