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카르댕 : 오늘은, 벌써 어제예요. 어제는 그저께고요.]
[앵커]
이렇게 늘 내일을, 미래를 바라봤던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피에르 카르댕'이 아흔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새로움을 향해 나아갔던 한평생이었습니다.
최하은 기자입니다.
[기자]
비틀스의 칼라 없는 재킷, 엉덩이를 한껏 부풀린 '버블 드레스', 우주비행사를 연상시키는 뻣뻣한 옷과 헬멧.
세계인을 사로잡은 유행은 모두 이 손끝에서 나왔습니다.
열네 살에 옷을 만들기 시작해 크리스찬 디올의 첫 번째 재단사가 됐습니다.
[피에르 카르댕 (지난 2월) : 디올이 아침 8시에 문을 열면 난 7시 반부터 그 앞에서 기다렸어요. 아무도 디올을 모르던 시절이었죠.]
관습과 전통을 깨뜨린 혁신가, 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프렝탕 백화점에 기성복 라인을 선보였습니다.
값비싼 맞춤복이 아닌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을 내놓았다는 이유로 의상조합에서 쫓겨났습니다.
서구 디자이너 최초로 베이징에 무대를 펼친 데 이어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도 처음으로 패션쇼를 올렸습니다.
국경을 넘어섰을 뿐 아니라, 피에르 카르댕이란 브랜드를 세계 곳곳에 남겼습니다.
돈을 받고 빌려준 이름이 140개 나라, 800개가 넘는 제품에 새겨졌습니다.
셔츠나 향수는 물론, 재떨이와 냄비에서도 이름을 볼 수 있어, 가장 유명한 프랑스인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라이선스의 나폴레옹', 그가 창조한 욕망을 더 많은 사람이 누리게 됐지만 돈을 쫓다 브랜드 가치를 떨어뜨렸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쏟아지는 제품에 자신의 브랜드를 붙인 미래주의자"라 평가했습니다.
[피에르 카르댕 (2014년) : 나의 스타일은 '현재, 과거, 미래'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결국 과거가 될 겁니다.]
아흔의 나이에 복귀 발표회를 열고 얼마 전까지도 대중 앞에 선 패션의 전설.
[피에르 카르댕 (2019년) : 제일 좋아하는 취미요? 일하는 거요.]
도전과 혁신이 시작된 자리엔 그가 남긴 유산을 기억하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영상그래픽 : 김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