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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브리핑] 여든여덟 줄 철조망…그 묵직한 울림

입력 2018-01-09 22:16 수정 2018-01-10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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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합니다.

작업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벌겋게 녹이 슬어버린 데다가 거칠게 얽힌 철조망 사이에는 사람을 할퀴는 가시마저 박혀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휴전선을 가로막고 있었던 낡은 철조망. 그것을 이용해 피아노를 만드는 작업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타악그룹 '공명'은 고민했습니다. 그들은 3년 전 분단 70주년을 맞아 기획된 '통일 피아노'의 제작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죠.

구부러진 철선을 곱게 펴고 상하지 않은 부분을 골라내고…조심스레 소리를 고르는 작업은 더디지만 꾸준히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북에 고향을 두고 내려온 노인은 피아노 앞에 앉아 꿈에도 잊지 못한 그 시절을 연주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피아노의 소리가 아닌 투박한 저음이었지만 왠지 모를 묵직함이 밴 깊은 울림.

남과 북 역시 오랜 시간 이렇게 녹슬고 구부러진 철선마냥 복잡하게 얽혀있었습니다.

통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북한의 젊은 후계자와 그에 못지않게 과격해 보이는 초강대국의 책임자. 그들이 마치 아이들처럼 핵단추의 크기로 말싸움을 하고 있을 때 우리의 평온한 일상 저변에는 불안감이 깔리고, 마음에는 녹이 슬고, 구부러지고, 가시는 가득 돋아있었지요.

그것은 이미 작가 한강이 미국인들을 상대로 토로했던 것과도 같습니다.
 

수십년간 축적된 긴장과 공포가
우리 내면에 쌓여있고,
그것들이 단조로운 대화 속에서
짧게 번뜩인다. 

- 소설가 한강. 뉴욕 타임스 기고 2017년 10월 7일


아마도 그 때문일 겁니다.

남북 고위급 회담이 다시 열린다고 해서…올림픽 한번 같이 치른다고 해서…그 모든 갈등이 해소되리라 여길 만큼 순진하진 않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회담이 진행되는 판문점으로 자꾸만 시선이 쏠리고 한 줄, 한 줄, 관련 속보가 나올 때마다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평생 분단으로 인해 마음을 다쳐왔던 노인은 휴전선 철조망으로 만든 피아노 앞에 앉아 평안남도 용강군. 두고 온 고향의 봄을 연주했습니다.

여든여덟 줄의 철선, 그 둔탁한 저음이 모여 만들어낸 소망은 휴전선을 넘어, 내를 건너고, 산맥을 넘을 것입니다. 
 
오늘(9일)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사진과 영상은 <제일기획>과 타악그룹 <공명>에서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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