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합니다.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 우리가 지옥문을 깨부수고 소년을 와락 끌어안을 수 있도록!
시인은 구의역 스크린도어 위에 소년을 위한 추모시를 붙였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누군가 '저런!' 하고 외치기도 전에 냉정한 세상을 떠나버렸고 시인의 추모시는 다가올 또 다른 비극을 경계하는 절규로 남았습니다.
당시 한 기자는 질문했습니다.
"그가 19살이 아니었더라도, 그의 가방에 컵라면이 없었더라도, 그가 생일 전날 떠나지 않았더라도 여기까지 왔을까"
남겨진 갈색 가방과 그 안에 담긴 물건들로 인해 자칫 묻혀버릴 수도 있었을 소년의 죽음은 그제서야 안타까움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는 부끄러운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편한 예감은 왜 늘 현실이 되고 마는 것일까.
"기계 혼자 보고 있습니다. 한 명 더 부탁드립니다"
위험천만했고… 두려웠을 순간이었습니다.
소년에게 있어 현장실습은 취업으로 이어지는 동아줄이었고… 위태로워도 그 줄을 놓을 수 없었기에 또 한 명의 소년은 또 그렇게 아프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은 마치 도돌이표처럼 또다시 대책을 이야기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그 죽음들 이후에 나온 법안들은 하나같이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고 세상은 타인의 아픔을 소비한 뒤 금세 그 아픔을 망각하고만 있으니…
우리는 그 안타까운 죽음들에 책임이 없는 것일까…
"우리 아이가 마지막이었으면…"
소년의 어머니가 했던 그 말은 세상에 다시금 과제를 남겼습니다.
모든 평범한 삶과 힘든 노동 안에 들어있을 그 많은 불합리와 고통.
그래서 1년 전. 구의역 스크린도어에 붙어있었던 그 시구는 오늘도 우리를 향해 이야기합니다.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 우리가… 소년을 와락 끌어안을 수 있도록!"
그리고 이것은 또 다른 비극을 경계하는 절규…
오늘(29일)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