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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브리핑] '박씨가 살지 않는 우리 동네'

입력 2017-07-04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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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4일)의 앵커브리핑은 박 씨 성을 가진 분들이 보시기엔 조금 서운할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소설가 이문구 선생의 연작소설 <우리 동네="">에는 다양한 농촌 마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흔한 김 씨와 이 씨는 물론이고 최 씨, 정 씨, 강 씨, 조 씨 등등…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김이박 이라 불릴 정도로 흔한 성씨인 박 씨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박 씨가 살지 않는 우리 동네… 그 이유는 작가가 남긴 또 다른 수필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군사정부 시절 작가는 영문도 모른 채 정보기관에 불려가게 됐답니다. 까닭을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우뚱하던 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

자신의 작품 중 유독 '박' 이란 글자에 빨간 동그라미가 처져 있었던 것…

"왜 박 씨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느냐…"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냐…"

요행히 풀려난 작가가 세운 대책은 간단했습니다.

"부정적인 인물이 됐건 긍정적인 인물이 됐건 아예 모든 소설의 등장인물에 박씨 성만은 붙이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천하였다"

박 씨가 살지 않는 <우리 동네="">는 그렇게 만들어졌던 것이지요.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려놓으려 했다"

이 말을 남긴 특검은 아마도 이문구의 <우리 동네="">를 읽어본 듯 저 한 마디 속에 블랙리스트 사건의 본질을 모두 담고 있었습니다.

예전 그 시대처럼 때리고, 잡아 가두고, 판매를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더 교묘하고 음습한 방법으로 이름들을 지우려고 했던, 탄핵된 정부의 실세들.

이문구 소설 속에 박 씨가 등장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아버지 정부의 문화정책은 대를 이어서 집요하게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독재는 습관이다. 그것은 마침내 질병으로 변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자신의 작품에서 남겼던 말입니다.

독재가 습관이듯 눈앞에서 지우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란 착각도 습관인 것일까.

고 이문구 선생의 연작. '우리 동네'가 지금 시대에 다시 쓰인다면 박 씨는 이제 자유롭게 등장할 수 있을까…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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