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호(51)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가 작성했던 '구명 로비 8인 리스트'의 실체가 검찰 수사로 속속 확인되면서 이 리스트가 결정적인 '판도라의 상자'였음이 새삼 사실로 판명되고 있다.
정 전 대표가 자신의 해외원정 도박 사건 항소심 변론을 맡은 최유정(46) 변호사에게 건넨 메모지 상의 이 리스트는 뉴시스가 지난 4월26일 보도한 '[단독] 정운호 로비 리스트 있다…검사장 출신 유명 변호사, 현직 판사 등장' 기사를 통해 존재가 처음 드러났었다.
홍만표 변호사 등이 포함된 이 리스트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당초 정 전 대표와 최 변호사 간 폭행 및 수임료 다툼이었던 사건은 '법조게이트'로 급격히 비화했다. 리스트 보도 이후 검찰은 관련 의혹에 대한 수사에 착수해 8명 가운데 3명을 구속기소했으며, 현직 부장판사는 최근 본격 수사 선상에 올랐다.
◇법조게이트 단초된 정운호 메모지 8인
정 전 대표는 지난해 12월 1심 재판에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자 변호인을 최 변호사로 교체했다. 최 변호사는 정 전 대표로부터 50억원의 수임료를 받아 논란을 촉발했던 장본인이다. 최 변호사는 현재 구속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정 전 대표는 변호인을 교체하면서 자신의 구명 전략도 새로 짰다. 기존에 법조계 로비 창구로 활용하던 인물들을 대폭 '물갈이' 한 것이다.
그 내용이 담긴 게 문제의 메모지였다. 정 전 대표는 자신을 면회 온 최 변호사 앞에서 각계 인사 8명의 이름을 적은 뒤 이들에게 "더이상 법조계 로비를 하지 말라"는 의견을 전하라고 요구했다.
정 전 대표가 거명한 인사는 검사장 출신 홍만표(57) 변호사와 법조브로커 이민희(56)씨, 성형외과 의사 이모(52)씨, 현직 부장판사 김모 씨 등이다.
또 네이처리퍼블릭 내에서 '회장'으로 불리는 S씨, 정 전 대표가 2003년 설립한 더페이스샵을 운영할 당시부터 가깝게 지낸 인물인 C씨, 정 전 대표의 가족과 P씨가 메모지에 등장한다.
정 전 대표는 최 변호사에게 건네는 메모지에 '빠져라'라는 세 글자를 적었다. 그 때가 올 1월이었다.
메모지 내용은 이후 네이처리퍼블릭 직원 박모씨에게 전해졌다. 이어 박씨를 통해 당사자들에게도 실제 전달된 사실이 홍만표 변호사를 통해 일부 확인됐다.
홍 변호사는 지난 5월 뉴시스와 가진 단독인터뷰에서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 전 대표 측으로부터) '변호사 활동을 그만 하셔도 될 것 같다'는 의사를 전해왔다"고 증언했다.
◇실체 드러나고 있는 정운호 구명로비
정 전 대표 구명을 위한 법조계 로비 활동의 실체도 리스트 속 인물들을 중심으로 상당 부분 드러났다.
핵심 인물인 홍 변호사는 지난해 7월부터 10월까지 정 전 대표의 100억원대 해외 원정도박 수사와 관련해 당시 서울중앙지검 간부 등에게 청탁한다는 명목으로 3회에 걸쳐 3억원을 받은 혐의 등으로 지난 6월 구속기소됐다.
또 브로커 이씨 역시 정 전 대표를 위해 다방면으로 활동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네이처리퍼블릭의 지하철 1·4호선 매장 사업권 입찰과 관련해 서울시 감사 무마 등 명목으로 정 전 대표 측으로부터 모두 9억원을 챙긴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상태다.
이씨는 정 전 대표의 항소심 사건 배당 당일인 지난해 12월말 항소심 담당 판사와 저녁 식사를 하면서 정 전 대표의 구명을 시도하기도 했다. 해당 부장 판사의 재배당 요청으로 사건은 다른 재판부에 배당, 처리됐다.
뉴시스가 일찌감치 의혹을 제기했던 성형외과 의사 이씨(5월3일 보도 '정운호 로비 창구에 웬 성형외과 의사 등장?…법조계 마당발 추정' 참고)는 최근에야 검찰 수사의 그물망에 걸려들었다. 이씨는 정 전 대표 구명 로비 대가로 1억원 상당의 금품을 수수한 혐의 등으로 15일 구속됐다.
이씨는 지난 3월께 수도권 한 지방법원 김모 부장판사에게 정 전 대표에 대한 구명 로비를 한 인물로 알려졌다. 정 대표 항소심 부장판사가 김 부장판사와 같은 곳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알고 선처의 뜻을 전해달라고 청했다는 것이다.
역시 8인 리스트에 포함돼 있었던 김 부장판사도 현재 본격적인 검찰 수사 선상에 올라 있다. 검찰은 이씨가 정 전 대표로부터 받은 1억원 상당의 금품 일부를 김 부장판사에게 건넨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이와 별개로 김 부장판사는 정 전 대표와 베트남으로 함께 여행을 다녔다는 의혹도 사고 있다.
이제 리스트 인물 8명 중 남은 4명인 정 전 대표의 가족과 S씨, C씨, P씨 등이 구명 로비에 얼마나 관여했는지 실체가 남은 검찰 수사를 통해 규명될지도 주목된다.
법조계 관계자는 "문제의 메모지를 만든 정 전 대표와 전달자인 최 변호사는 물론이고 로비창구로 의심되는 메모지 인물 4명도 사법처리 단계를 밟고 있다"며 "당사자들로선 정 전 대표의 자필 메모가 원망스러울 수 밖에 없으니 '저주의 메모지'라고 부를 만하다"고 말했다.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