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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욱의 기후 1.5] 법조문에만 존재하는 원칙, 정의로운 전환

입력 2023-08-07 08:01 수정 2023-08-07 08:04

'먼 미래'에서 '내 일'로 찾아온 기후변화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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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미래'에서 '내 일'로 찾아온 기후변화 (195)

온실가스 감축과 탄소중립은 어느덧 '들어봤을 법한 키워드'가 됐습니다. '얼마나 아느냐'는 것은 개인차가 있겠지만, 적어도 '그게 무엇인지'는 한 번쯤 들어보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들과 함께 파리협정에 담긴 또 다른 키워드인 '정의로운 전환'은 여전히 낯선 존재입니다. 7월 11일, 정의로운 전환 소송 기자회견이 열렸고, 정부에 실질적인 정의로운 전환을 촉구하기 위한 행정소송까지 제기됐음에도 말이죠.
 
지난달 11일, 전력연맹은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정의로운 전환 소송 기자회견을 열었다.

지난달 11일, 전력연맹은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정의로운 전환 소송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은 2015년 파리협정 채택 당시 갑자기 튀어나온 '신조어'가 아닙니다. 어찌 보면, 탄소중립보다도 더 오래된 개념이기도 합니다. 전국 탈석탄 네트워크인 〈석탄을 넘어서〉에 따르면, 이 개념의 유래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미국의 석유·화학·원자력 노동조합(Oil, Chemical and Atomic Workers Union)은 노조원들이 처한 유해 환경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기금인 슈퍼펀드(Superfnud for Workers) 마련에 나섰습니다. 이 캠페인은 이후 '정의로운 전환'으로 이름이 바뀌었죠.


기후변화 대응에 있어 정의란 무엇인지, 또 정의로운 전환이란 무엇인지. 정의(正意)의 정의(定義)는 우리나라의 법조문에 명확히 담겨 있습니다.

“기후정의”란 기후변화를 야기하는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사회계층별 책임이 다름을 인정하고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의사결정 과정에 동등하고 실질적으로 참여하며 기후변화의 책임에 따라 탄소중립 사회로의 이행 부담과 녹색성장의 이익을 공정하게 나누어 사회적·경제적 및 세대 간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을 말한다.

“정의로운 전환”이란 탄소중립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적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지역이나 산업의 노동자, 농민, 중소상공인을 보호하여 이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담을 사회적으로 분담하고 취약계층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정책방향을 말한다.
 
[박상욱의 기후 1.5] 법조문에만 존재하는 원칙, 정의로운 전환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의 제2조에 담긴 내용입니다. 기본법에선 기후변화, 기후위기, 탄소중립, 탄소중립 사회, 온실가스, 온실가스 배출, 온실가스 감축, 온실가스 흡수, 신·재생에너지, 에너지전환, 기후위기 적응, 기후정의, 정의로운 전환, 녹색성장, 녹색경제, 녹색기술, 녹색산업 총 17가지 키워드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17가지는 기본법이 중요하게 보는 핵심 요소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156번째 연재 〈[박상욱의 기후 1.5] 에너지전환의 필수 전제 조건, 정의로운 전환〉에서 국내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들과의 심층 인터뷰를 전해드린 바 있습니다. 입사 3년차부터24년차까지, 당진석탄화력발전소의 직군별 노동자들과의 인터뷰였습니다. 당시 인터뷰에 나선 이들 중 탈석탄 정책에, 온실가스 감축에, 탄소중립에 반대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진석탄화력발전소의 노동자들이 탄소중립과 정의로운 전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당진석탄화력발전소의 노동자들이 탄소중립과 정의로운 전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탄소중립은 사회적, 국가적 비전입니다. 이는 전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하고, 저희 역시 지구에 살고 있는 구성원이기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희의 고용에 심각한 위기가 오고 있지만, 그럼에도 저희가 이에 대한 투쟁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이 방향성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갑희(당시 입사 17년차, 발전소 운영 담당, 노조위원장)

“저희는 탄소중립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희도 고용이라는 것이 잇지 않습니까. 저희도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인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런 막막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죠. 환경단체 분들이 말씀하시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탈석탄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환경단체 분들 가운데 우리 노동자들과 대화를 한 번 해본 적이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민현기(당시 입사 24년차, 탈황설비 담당)

“미세먼지, 온실가스 등 대두되는 환경문제가 커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면에 있어서는 저도 불만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리고픈 것이 있다면, 발전소 밖에 계신 분들이 한번쯤, 여기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이걸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종상(당시 입사 7년차, 석탄 운송 담당)
 
[박상욱의 기후 1.5] 법조문에만 존재하는 원칙, 정의로운 전환
문제는, 일터의 폐쇄(탈석탄)는 확정됐는데, 그 일터에서 일하는 이들의 향방에 대해선 그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발전사업자도, 정부도, 그 누구도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다' 알려주지 않는 것이죠.

“호남화력발전소가 폐지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아, 이게 지금 당장 눈앞의 일로 찾아왔구나', '우리 일자리가 위협받고 있구나'라는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탈석탄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는 형성됐지만, 이 정책이 여기서 일하는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 맞는가 의문이 들었죠. 시설의 변화는 정해졌는데, 기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책은 발표된 것이 없고, 그저 '탈석탄' 그 자체에 대한 정책만 계속 들리다보니 점점 우려가 더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성하(당시 입사 3년차, 발전소 보안 담당)

“제가 1, 2호기 폐쇄할 때 정년을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 회사를 믿고,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생각으로 와서 이제 막 입사한 후배들도 많습니다. 당장 당진 1, 2호기가 2029년 폐쇄된다면, 이 직장이 안정적이라고 믿어오고, 여기서 열심히 일해보겠다는 후배들도 많은데, 그들의 담당 호기가 1, 2호기라면 폐쇄 즉시 일자리가 없어진다고 보면 됩니다.”
민현기(당시 입사 24년차, 탈황설비 담당)
 
[박상욱의 기후 1.5] 법조문에만 존재하는 원칙, 정의로운 전환
전국공공산업노동조합연맹이 실시한 대규모 설문조사에서도 마찬가지의 우려가 나왔습니다. 전국 5개 발전사 1만 6천여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정부가 탈석탄에 따른 고용 문제 해결에 노력하고 있지 않다고 답한 이들이 82.8%에 달했습니다. 또, 2030년 NDC(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상향에 따른 일자리 전환 정책이 부족하다는 응답은 95.9%에 달했습니다. 탈석탄은 먼 미래가 아닌, 당장 코 앞의 일로 다가왔는데, 아무 대책이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근무 중인 발전소에 언제부터 고용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보는가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36.5%가 5~10년이라고 답했습니다. 3~5년이라고 답한 이들도 30.4%에 달했고, 17.2%는 2~3년이라고 답했습니다. 이는 그저 막연한 추정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 없습니다. 각 발전설비마다 정해진 수명이 있고, 이 수명을 연장하지 않는다면 일자리는 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박상욱의 기후 1.5] 법조문에만 존재하는 원칙, 정의로운 전환
노동자들의 이러한 우려는 분명, 기본법에 따르면 벌어져서는 안 될 일들입니다.

“기후위기로 인한 책임과 이익이 사회 전체에 균형 있게 분배되도록 하는 기후정의를 추구함으로써 기후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을 동시에 극복하고, 탄소중립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취약한 계층·부문·지역을 보호하는 등 정의로운 전환을 실현한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 제3조(기본원칙)

전환의 과정에 취약한 계층과 부문, 지역을 보호하는 것은 말 그대로 '기본 원칙'입니다. 하지만 발전 노동자들도, 대규모 발전설비에 기댄 경제구조를 가진 그 지역도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기본적인 원칙조차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과연 탄소중립은, 녹색성장은 제대로 이행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일자리 전환, 정의로운 전환에 무관심한 것은 비단 정부만이 아닙니다. 시민단체에서도 발전믹스의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와 정의로운 전환을 촉구하는 목소리의 크기나 빈도를 따졌을 때, 전자에 치중하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스피커'가 부족한 만큼, 언론의 조명이 적은 것 또한 사실이고요.

우리보다 앞서 전환을 겪은 나라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던진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이 정의로운 전환에 관한 질문입니다. 지난 2021년 5월, 유럽에서도 대표적으로 대대적인 전환에 나서고 있는 스웨덴의 야콥할그렌 당시 대사를 만났습니다.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힌트'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그 답을 방송으로 전할 기회를 얻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2년이 더 지나서야 그와의 문답을 전합니다.
 
야콥 할그렌 전 주한스웨덴 대사가 정의로운 전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야콥 할그렌 전 주한스웨덴 대사가 정의로운 전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Q. 스웨덴의 전환 과정에서 고용 충격엔 어떻게 대응했는지?
A.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일자리나 회사, 미래가 어떻게 될까 걱장하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이러한 변화는 언제나 있었고, 불가피했습니다. 이러한 전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통제하느냐가 관건인 이유입니다. 그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로 달라질테니까요. 새로운 기술을, 새로운 전환을 계속해서 외면하고 따라가지 않는다면, 일자리가, 기업이 아예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스웨덴의 경우, 이 과정에서 사람에 집중했습니다. 일자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호한다는 개념으로 정의로운 전환에 나선 겁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시민들이 재교육을 받고, 자기개발에 나서는 데에 도움을 주는 데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국가와 정부가 일종의 '공동 책임'을 지는 것이죠. '공동 책임'이라는 것은, 정부와 기업 모두 교육에 투자하는 책임이 있지만, 마찬가지로 개인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민 개개인도 자신의 스킬과 역량을 계속해서 개발하고, 재교육을 통해 전환에 적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죠. 스웨덴의 정치인과 기업 리더들, 노동자들, 일반 시민 모두가 책임을 갖고 함께 노력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첨언하자면, 저는 스웨덴 남부 출신입니다. 제가 살던 곳엔 1970~80년대 대규모 조선소가 있었죠. 하지만 한국 등과의 경쟁에 밀려 조선소는 문을 닫게 됐습니다. 한국의 조선 기술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일자리도, 경제도 영향을 피할 수 없었죠. 이후 이 지역은 완전히 새로운 산업에 집중했고, 새로운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오늘날의 스웨덴 북부도 비슷한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제조 과정에서 탄소 배출이 전혀 없는 '그린 스틸'을 생산하고 있죠. 이러한 사례들은 곧 전환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대로 머무른다면, 그래서 과거의 기술에만 머물게 된다면 일종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지난 2021년 10월, 전환 과정에 위기에 처한 또 다른 노동자인 자동차 정비 노동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 또한, 전할 기회를 얻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노동자의 목소리와 다른 해외의 '유경험자'들의 조언은 다음 주에도 이어서 전해드리겠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법조문에만 존재하는 원칙, 정의로운 전환
박상욱 기자 park.lepremier@jt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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