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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참상' 알리다 흉기 피습…'민주화' 외침 찾아가 남긴 사진 3천장

입력 2023-05-17 20:36 수정 2023-05-17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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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생각해 보면, 80년 광주는 고립돼 있었고 그래서 당시에는 계엄군의 만행을 알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당시 서슬퍼런 시절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 상황을 이곳저곳 알린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이해선 기자가 만났습니다.

[기자]

목발에 의지한 지도 꼬박 40년이 흘렀지만 박창신 신부는 아직도 1980년 5월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박창신/신부 : 광주에서 지금 난리 났다고. 막 시신이 여기저기 있다고.]

고작 1시간 거리 익산인데, 일이 터지고 하루가 지나서야 소문이 전해졌습니다.

[박창신/신부 : 화가 났지. 언론인들이 하는 것을 내가 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못 하고 막혀 있으니까.]

마을을 다니며, '전두환'을 지목한 유인물을 뿌리고 방송을 했습니다.

[박창신/신부 : 스피커로 막 '군인들 때문에 광주 난리 났다'고…]

함께 다닌 신자들은 곧 경찰에 잡혀갔습니다.

중학교 3학년 어린 학생들이었습니다.

박 신부라고 무사하지 못했습니다.

성당 사제관에 괴한들이 들었습니다.

[박창신/신부 : 온 천지 맞고, 그 흉기로 다섯 군데… 그때 여기에 핏자국도 있었고, (경찰이) 조사하고도 발표를 않더라고.]

알리려다, 하반신 마비까지 겪었지만 박 신부는 '기록하겠다'는 의지를 다졌습니다.

[박창신/신부 : 좋은 세상을 이루는 현실적인 것을 담아놔야 나중에도 참고가 되잖아요. 나는 열심히 찍은 거야. 그때 내 생활비가 13만5000원인데, 한 달 사진값이 15만원…]

시위 현장 그 자체 뿐 아니라, 시위에 앞서 푯말을 준비하고, 끝나면 맨바닥에 주저 앉아 숨을 돌리는 사람들까지 담았습니다.

[박창신/신부 : (이건) 자녀들이 잡혀서 교도소 갔던 어머니들의 모임을 '민가협'이라고 하는데 최루탄 쏘지 말라고 엄마들이 전경들한테…]

80~90년대 이렇게 찍어둔 사진이 3000장, 모두가 볼 수 있게 기부했습니다.

[박창신/신부 : 아무리 민주화해도 10년이면 잊어버리더라고요. (과거를) 기록에 남겨서… 그러면 그것이 지금 우리가 보는 세상을 볼 수가 있잖아요.]

(화면제공 :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영상그래픽 :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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