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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흠모하는 자도, 가장 죽이고 싶은 자도 이순신"...문학으로 본 한산대첩

입력 2022-08-10 16:09 수정 2022-08-10 16:21

칼의 노래ㆍ징비록ㆍ난중일기 속 한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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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ㆍ징비록ㆍ난중일기 속 한산대첩

영화 〈한산〉 포스터영화 〈한산〉 포스터
영화 〈한산:용의 출현〉이 관람객 500만명을 곧 넘어설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여름 영화 빅4 가운데 현재로서는 가장 선전하고 있죠.

영화의 배경이 된 1592년 한산대첩은 많은 드라마와 문학의 소재로 등장했습니다. 이순신이 직접 쓴 〈난중일기〉, 류성룡의 〈징비록〉 등 당대인들이 쓴 책은 지금도 읽힙니다. 말 그대로 워낙 영화 같고 소설 같은 승리였기 때문이죠. 문학 속 한산대첩은 어땠을까요.

한산대첩이 벌어진 건 1592년 8월 한여름이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공한 지 넉 달째 되던 시점입니다. 당시 조선군은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선조는 한양을 내주고 평양으로 도망쳤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선조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우리 수군 10만 명이 곧 서해로 도착합니다. 임금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류성룡 〈징비록〉

편지 내용처럼 일본군은 육로로 평양을 압박하고, 수군은 서해를 따라 올라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바다에서의 계획은 처음부터 삐걱거립니다. 이순신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일본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를 급파합니다. 수군도 추가로 파견하죠.
한산대첩에서 이순신에 대패한 와키자카 야스하루.한산대첩에서 이순신에 대패한 와키자카 야스하루.

그렇게 두 나라 수군은 거제 앞바다에서 맞닥뜨리게 됩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곧바로 일본군이 있는 견내량으로 쳐들어가자고 주장합니다. 그러자 이순신은 "공은 병법을 모른다"고 한 마디 합니다. 이순신이 생각한 건 유인 후 포위섬멸전입니다.

"견내량의 지형이 매우 좁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이 서로 부딪치게 될 것 같아서 싸움하기가 곤란했다.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다."
이순신 〈난중일기〉

전투 당일, 5~6척의 판옥선이 일본군을 끌어내기 위해 출발합니다. 영화에서는 적장 와키자카가 이순신의 유인책에 쉽게 말려들지 않습니다. 역사에선 반대였습니다. 육지에서 대승해 자신감에 차 있던 와키자카는 곧바로 추격명령을 내립니다.

"대여섯 척으로 먼저 엄습할 기세를 보이게 하니
전선들이 일시에 돛을 올려서 쫓아 나왔다. 우리 배는 거짓으로 물러나면서 돌아 나오자 왜적들도 따라 나왔다."
이순신 〈난중일기〉

그렇게 일본 함대 73척은 좁은 견내량을 넘어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나오게 됩니다. 조선 수군의 강점인 포격전을 벌이기 좋은 전장이었습니다. 와키자카도 이때쯤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조선군이) 큰 배를 양쪽으로 벌려 세워 우리 군을 에워쌌다. 이는 유인하며 무찌르는 계책임이 분명했다."
〈와키자카기〉 ※와키자카 가문이 남긴 기록

"학익진을 펼쳐 일시에 진격하여 총통을 쏘아서 먼저 두세 척을 깨뜨리자
여러 배의 왜적들은 사기가 꺾이어 물러나므로 군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잇달아 쏘아대니 그 형세가 마치 바람 같고 우레 같아 적의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다 해치워 버렸다."
이순신 〈난중일기〉

전투 결과는 〈한산〉 속 대사처럼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 일본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와키자카는 무인도로 도망쳐 미역을 씹어먹으며 열흘을 버텼습니다. 반면 조선군 전사자는 단 3명이었습니다. 소설 〈칼의 노래〉는 전투장면을 좀 더 문학적으로 묘사합니다.

“날개는 멀리서부터 적을 조인다. 적은 집중되고 나는 분산된다. 집중된 적은 분산된 나를 향해 쏜다. 적의 화력은 집중에서 분산으로 흩어진다. 분산된 나는 집중된 적을 향해 쏜다. 나의 화력은 분산에서 집중으로 모인다.

진은 거대한 새처럼 물 위에서 너울거린다. 너울거리면서 적을 가슴 깊이 품는다. 품어서 죽인다. 펼쳐서 가두고, 조여서 품고, 품어서 죽인다.”
김훈 〈칼의 노래〉

하루 만에 끝난 전투였지만 영향은 컸습니다. 일본군은 한산대첩 이후 조선 수군과 싸움을 포기합니다. 남해안을 따라 왜성을 짓고 버티기에 돌입하죠. 평양까지 진격해있던 일본군은 결국 보급로가 막혀 더는 전진하기 어려워지게 됩니다.

"이 한 번의 전투로 적의 팔 하나를 잘라버렸다."
류성룡 〈징비록〉

와키자카는 5년 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다시 한번 패합니다. 영화 〈명량〉에서 그는 "이순신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라고 되뇌죠. 그래서 나중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자도, 가장 미운 자도 이순신이다. 가장 좋아하는 이도, 흠모하고 숭상하는 자도 이순신이다. 가장 죽이고 싶은 이도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자 또한 이순신이다."

와키자카가 정말로 이 글을 썼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시 전투를 복기하다 보면 와키자카의 두려움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나는 성급했고 적장은 침착했다. 나의 전술은 단순했지만 그의 전술은 치밀했다. 나는 적장 앞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와키자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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