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가장 왼쪽)의 군사보좌관을 지낸 박진희 육군 56사단장(왼쪽에서 세 번째). 박정훈 전 해병대수사단장(가장 오른쪽)과 다음 박 전 단장 항명 혐의 재판에 증인으로 채택된 임기훈 전 국방비서관(왼쪽에서 두 번째) 〈출처=연합뉴스〉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군사보좌관을 맡았던 박진희 육군 56사단장이 오늘(3일) 법정에서 박정훈 전 해병대수사단장의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를 비판했습니다.
박 사단장은 군사법원에서 열린 박 전 단장의 항명 혐의 재판에 군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해
"박 전 단장이 열심히 수사했지만 마치 수사 지휘를 유족에게 받은 것처럼, 유족이 원하는 부분으로 수사했다"고 말했습니다.
박 전 단장이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의 혐의가 포함된 수사 결과를 경찰로 이첩했던 것이 '유족이 원하는 수사 방향이었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풀이됩니다.
지난해 7월 20일 해병대 1사단 내 분향소 아들의 사진 앞에서 울고 있는 채 상병의 어머니 〈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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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의 요구는 "현장 상황 수사 잘해달라"
박 사단장의 증언을 검증하기 위해 채 상병 유가족의 진술 내용을 확인해 봤습니다.
채 상병의 아버지는 아들 순직 이틀 뒤인 지난해 7월 21일 해병대수사단 조사에 응했습니다.
JTBC가 입수한 진술조서엔 박 사단장이 말한 '유족의 수사 지휘'로 볼 만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다만 해병대사령부 수사관이 아들을 잃은 아버지에게 바라는 게 있는지 물었던 내용은 있습니다. 채 상병 아버지의 해병대수사단 진술조서 일부를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 해병대 수사관 "이번 아들의 사망 사건과 관련해 우리 (해병대수사단) 광역수사대로 요구할 사항이 있나요." · 채 상병 아버지 "집사람이 요구했던 사항처럼 현장에 있었던 간부들이 우리 아들을 구조할 수 있었는데 안 구했는지, 무서워서 못했는지, 아니면 당황해서 그랬는지, 그 사실에 대해 명확히 수사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명확히 수사를 해달라. 구체적으로는 '현장 간부들이 우리 아들을 구할 수 있었는데 못 구했던 건 아닌지 밝혀달라'는 게 부모가 요구한 전부였습니다.
임 전 사단장을 수사해달라는 요구가 없었던 건 물론이고, 누구를 넣어달라거나 빼달라는 요구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해병대수사단이 전한 아들의 사망 원인을 '어렵지만 받아들인다'고 했을 뿐입니다.
· 해병대 수사관 "아들이 익사로 인해 사망했음을 인정하나요." · 채 상병 아버지 "네…. 이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현실인데…." 지난해 7월 19일 채 상병이 급류에 휩쓸려 실종된 뒤 침울한 표정으로 구조 소식을 기다리는 해병대 전우들 〈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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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은 수사를 지휘할 수도, 요구할 수도 없었다
유족이 박 전 단장에게 혹은 해병대수사단에 수사와 관련해 뭔가를 요구하거나 지휘할 수 있었는지, 당시 상황을 날짜별로 정리해보겠습니다.
7.21(금) 해병대수사단은 아버지로부터 진술을 들은 그 날, 유족에게 이틀 동안 진행한 1차 중간 수사결과를 설명했습니다.
7.22(토) 박 전 단장은 다음 날 채 상병 영결식을 마치고 해병대사령부로 복귀하면서 김계환 해병대사령관에게 "사안의 중대함을 고려해 다음 주부터 수사단장이 직접 현장 지휘하겠다"고 보고했습니다.
7.24(월) 박 전 단장은 김 사령관에게 보고한 대로 이날부터 포항과 예천을 오가며 수사를 지휘했습니다.
7.28(금) 나흘 뒤, 박 전 단장은 김 사령관에게 먼저 수사결과를 보고했고, 오후 2시쯤 남원에 있는 채 상병 조부모집으로 가 유가족 10여명을 대상으로 "임 전 사단장 등 8명에 대해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가 있어 다음 주 초 관할인 경북지방경찰청으로 사건을 넘기겠다"고 설명했습니다.
7.30(일) 박 전 단장은 이틀 전 유족에게 설명한 내용과 똑같은 수사 결과를 이 전 장관에게 보고해 결재를 받았습니다.
정황상 유족이 끼어들 틈이 없었을 뿐 아니라 수사 결과가 바뀐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전 장관이 다음날(7월 31일) 스스로 결재한 것을 번복하고 이첩 보류 지시를 내리면서, 결과적으로 수사 결과가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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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 수사 지휘" 발언 다음엔 "상명하복" 언급
유족의 진술 내용을 봐도, 당시 상황을 날짜별로 따져봐도, 유족이 사건을 지휘하거나 개입할 여지는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박 사단장 외에 이런 의혹을 제기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박 전 단장에게 상관명예훼손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이 전 장관조차도 유족에 대한 발언을 한 적은 없었습니다.
박 사단장은 오늘 "유족 수사 지휘 받은 듯" 발언 직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명백히 군에서 상명하복이 이뤄져야 하는데 이 사건에선 이뤄지지 않았다. 장관의 정당한 지시를 외압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은 이 전 장관이 스스로 결재한 사건을 다음날 번복해 이첩 보류를 지시하고, 해병대수사단이 경찰로 이첩한 사건을 군검찰이 회수해 와 결과적으로 임 전 사단장의 혐의가 빠지게 된 과정에 누군가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입니다.
박 사단장의 주장대로 '상명하복'이 이뤄지지 않은 것인지(박 전 단장이 정당한 지시에 항명한 것인지), 정당한 수사 결과가 누군가의 개입으로 바뀐 것인지(수사에 외압이 있었던 것인지)를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때문에 박 사단장은 "상명하복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또 오늘 군사법원에서 한 발언이 '실제로 유족이 수사를 지휘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박 전 단장이 유족이 원한 수사 결과를 만들기 위해 항명한 것 같다'는 취지의 발언은 증거(유족 진술조서)를 봐도, 정황(일자별 수사 진행 상황)을 봐도,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