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 서울ㆍ경기지부 회원들이 13일 용산 대통령실 인근에서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사퇴 촉구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연합뉴스〉
지난 6일 취임한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발언과 역사 인식을 둘러싸고 자격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김 관장 임명이 반쪽 광복절을 만든 원인입니다.
독립운동가 후손 단체인 광복회는 임명 강행에 반대해 처음으로 광복절 기념식에 불참했고 48개 국내 역사학회와 단체는 임명 철회를 요구하는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김 관장은 "사퇴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논란의 발언과 주장이 많습니다. 그 중 최근 불거진 것들은 "일제 강점기 우리 국민이 일본 국적"이었다거나 "안익태와 백선엽 등에 대한 친일 여부를 재검증해야 한다" 는 등의 내용입니다.
이에 대해 팩트체크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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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일제강점기 우리 국민의 국적은 일본이었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14일 오후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겨레누리관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출처:연합뉴스〉
"일제강점기에 우리 국민의 국적은 어디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국적은 법적인 자격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답했죠. '일제강점기에 우리 국민들의 국적은 일본이었죠. 그래서 우리가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8월 12일, CBS 김현정 뉴스쇼)
'일제 강점기 때 우리 국민들은 일본 국민이었다'는 게 김형석 관장의 주장입니다.
'한일 합방을 당해 원치 않게 일본 국민이 되었다'는 취지입니다.
외국에 유학 가려면 일본 여권을 가져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김 관장은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국적을 일본으로 했던 점 등을 근거로 삼았습니다.
김 관장은 '법적인 자격'을 강조했습니다.
외형적으로 김 관장의 말이 틀리지 않아 보입니다.
이 말엔 함정이 있습니다.
국민은 국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그에 맞는 권리와 의무를 부담하토록 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국민은 일본 국민과 같거나 상응하는 권리와 의무가 주어졌을까요.
다양한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무력 통치에 따라 노예에 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강제징용 및 위안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입니다.
이에 대해 일본은 적법한 행위로, 자발적 지원에 의한 노동이라고 강조합니다.
일본 법원은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당시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을 우리 피해자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우리 법원의 판단은 다릅니다.
2012년 '일제 강제 동원 손해 배상 청구권' 소송 대법원 판결문
2012년과 2018년 대법원은 일본 법원이 피해자들을 합법적으로 동원된 일본인으로 보고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없다는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强占)에 지나지 않고, 일본의 불법적인 지배로 인한 법률관계"라고 봤습니다. (2009다68620)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이 일본법의 적용을 받은 일본 국적자가 아닌 점을 밝힌 겁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한국어본(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김 관장의 법적으로 일본 국민이었다는 주장은 1910년 강제로 체결된 한·일 합병조약이 유효하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조약 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讓與)함"이라는 대목입니다.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 조약' 〈사진 출처 : 일본 외무성〉
1965년 8월 국회 한일간 조약과 재협정 비준동의안 심사특별위원회 국회 회의록.
그러나 1965년 한일 양국의 기본 관계 조약이 체결될 즈음 우리 국회는 "1910년 8월 22일의 합방조약이나 그 이전
대한제국과 일본국 간에 맺어졌던 모든 조약과 협정은 과거 일본의 침략주의의 소산이며 우리 민족 감정이나 일본의 한국 지배가 불만이었다는 우리의 기본 입장으로 볼 때에 당연히
무효라는 것은 두말 할 것 조차 없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본 국적'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은 또 있습니다.
현재에도 시행되고 있는 국적법입니다.
일제 강점기 한국과 일본 법 체계를 연구해 온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일 병합 이후 일본은 자국에 있는 국적법을 우리나라에서는 시행하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배경에 대해선 "
일본 국적법을 적용하면 한국민이 국적을 쉽게 이탈할 수 있게 돼 적용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국적자가 되면 국적을 버리거나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권리가 주어지는데, 이를 주지 않은 겁니다.
일본은 대신 우리 국민을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해 국적법이 아닌 호적법을 만들어 적용했습니다.
결국 일제 강점기 우리 국민의
국적이 일본이었다는 주장은 당시 상황을 평면적으로 접근해 주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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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안익태ㆍ백선엽 친일 여부 검증 필요하다?
“안익태 같은 경우에도 친일 인명사전에는 올라 있는데 이 보고서에는 빠져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분들이 그럼 빠진 이유가 뭐냐. 법적으로 볼 때 이거 명확한 근거가 있는 분들만 채택을 한 겁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검증 작업이 필요하다...”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4389명의 친일인명사전을 확인해 봤습니다.
친일인명사전 '안익태'(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발간)
① 1938년 일본 천황 즉위식 때 축하작품으로 연주되는 '에텐라쿠'(越天樂ㆍ월천악) 작곡ㆍ발표ㆍ지휘 ② 1940년 '일본 탄생 2600년 기념 봉축음악' 작곡ㆍ발표ㆍ지휘 ③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한 축전곡 '만주환상곡' 작곡ㆍ발표ㆍ지휘 ④ 1943년 독일 나치 정부 제국음악원 회원증 교부 ⑤ 1944년 파리에서 '일본축전곡' 연주 (친일인명사전, 안익태편)
안익태 기념재단 연구위원장을 지낸 김 관장은 안익태의 친일 행위는 법적으로 명확한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친일인명사전의 내용은 총 70개의 사료를 바탕으로 5개 이상의 친일 행위를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2006~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밝힌 친일 대상자 1005명에 안익태가 빠진 것은 민족문제연구소에 비해 친일 행위 판단 기준이 축소됐기 때문이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 행위를 30개의 기준으로 나눴고 안익태를 “작사ㆍ작곡ㆍ노래ㆍ연주 등 창작과 단체활동을 통해 일제 식민 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로 봤지만 정부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에선 이를 20개 기준으로 축소하면서 예술 선동 친일 행위는 제외됐습니다.
진상규명 특별법 통과를 위한 여야 합의 과정에서 5급 이상 공무원, 예술·해외 활동 분야 제외 등 판단 범위가 대폭 좁아진 겁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정부 차원에서 이뤄진 첫번째 진상 규명 활동이기 때문에 법 자체가 듬성듬성하게 만들어졌다”며 “적극적인 행위는 포함됐는데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행위들인 특히 문화, 예술 활동들이 많이 빠졌다”고 말했습니다.
안익태 유족 측이 지난 2021년 광복회를
사자(死者) 명예훼손으로 고발했지만 경찰은 혐의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불송치 결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김 관장은 백선엽 장군에 대해서도 “108회에 걸친 간도특설대 실상 파악에도 '백선엽' 이름 없다”(2022년 8월 월간조선)는 기고를 통해 친일에 대한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간도특설대는 한국 사람들을 동원해 독립군 활동을 탄압하도록 조직된 특수부대였습니다.
하지만 백 장군은 민간, 정부 조사에서 모두 친일 행위자 명단에 올랐는데 정부 진상 보고서를 확인해보니 그는 자신이 1993년 일본어로 발간한 '간도특설대의 비밀'이란 책에서 “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7권 825p)고 적었습니다.
범위를 좁게 잡은 정부 진상규명위가 백 장군을 친일행위자로 판단한 이유입니다.
김 관장은 친일인명사전이 민간에서 만든 주관적인 것이라며 검증 필요성을 주장하지만, 김 관장 역시 민간 학자에 불과합니다.
〈자료조사 지원 : 이채리 박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