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 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아티클 바로가기 프로그램 목록 바로가기

[박상욱의 기후 1.5] 글로벌 산업계가 마주한 장애물, 석탄

입력 2024-04-15 08:01 수정 2024-04-16 01:12

'먼 미래'에서 '내 일'로 찾아온 기후변화 (231)

크게 작게 프린트 메일
URL 줄이기 페이스북 X

'먼 미래'에서 '내 일'로 찾아온 기후변화 (231)

ASML 2023 연차보고서 표지 (자료: ASML)

ASML 2023 연차보고서 표지 (자료: ASML)

“2025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한 네덜란드 기업의 선언에 전 세계 관련 산업계가 들썩였습니다. 미국이나 일본도 아니고, EU 회원국 중 자주 언급되는 선진국도 아닌데 웬 호들갑이냐 싶을 수 있지만, 이 기업의 결정을 두고 국내에선 지난해부터 각종 우려가 쏟아졌습니다. 바로, 이러한 선언을 한 기업이 ASML,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핵심 공급 업체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반도체 장비업체의 탄소중립 선언이 그 기업의 고객사인 우리 기업에 무슨 영향을 미치느냐'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ASML은 자사 스스로의 탄소중립만을 선언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2025년까지 ASML의 자체적인 직접 배출인 Scope 1과 자사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전력에서 비롯되는 간접 배출인 Scope 2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데에 이어 그 외 모든 간접 배출을 의미하는 Scope 3 배출량까지 0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죠. 2030년엔 ASML에 부품 등을 대는 공급망 기업의 배출량도, 2040년엔 ASML의 제품을 구매하는 고객사의 배출량도 '넷 제로'를 달성하겠다는 것입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글로벌 산업계가 마주한 장애물, 석탄
얼핏 보통의 '한국 마인드'로는 이해가 어려운 부분입니다. Scope 1~3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도, Scope 3를 이야기할 때에 기업에 부품이나 중간 단계의 제품을 공급하는 하청 또는 벤더, 협력사 등의 배출량, 즉 '공급망에서 비롯된 배출'을 이야기합니다. 수출 비중이 큰 대기업의 ESG 경영과 관련 공시, EU 등 해외의 공급망 실사 등으로 중소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벤더, 하청 또는 협력사의 입장에서 Scope 3 배출은 그 회사가 납품한 대기업의 배출량까지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국내에선 대기업이 하청업체에 배출량 통계를 요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처럼 다뤄지는 반면, 중소기업이 고객사인 대기업에 배출량 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언감생심인 상황인 것이고요. 결국, 고객사가 국내에도, 해외에도 있는 중소기업의 입장에선 오히려 완성품을 판매하는 대기업보다도 더욱 열악한 현실에 내몰린 셈입니다.

ASML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글로벌 반도체 제조기업에 장비를 납품하는 기업입니다. 하지만 보통의 하청 또는 벤더와는 달리 '슈퍼 을(乙)'로 불립니다.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를 제조하는 세계 유일의 기업이기에, ASML의 장비 없이는 최신 반도체 제조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ASML이 Scope 3 배출의 넷 제로를 선언하며 자신있게 '고객사의 탄소중립'을 외친 이유이자, 그 선언에 우리나라가 시끌벅적해진 이유입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글로벌 산업계가 마주한 장애물, 석탄
우리의 입장에선 ASML의 탄소중립 선언도 갑작스럽지만, 그 목표 시점조차 매우 갑작스러운 일입니다. 2022년 기준, ASML이 위치한 네덜란드에서 재생에너지가 전체 발전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6.1% 가량입니다.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거의 4배에 달하는 수준이나, 한 국가의 산업부문 전반에 걸친 Scope 2 넷 제로를 달성하기엔 쉽지 않은 전력믹스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석탄과 천연가스, 석유 등 화석연료의 발전 비중이 55%에 육박하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 기업의 입장에서,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와 별도로 재생 전력 공급 계약을 맺거나 녹색프리미엄요금제 등을 이용하지 않고서 그저 콘센트에 코드를 꼽아 전기를 끌어다 쓴다면, 다량의 Scope 2 배출은 불가피하죠.

그래서일까요. ASML이 미국 회계기준인 US GAAP(General Accepted Accounting Principle)에 따라 발간한 2023년 연차보고서에선 Renewable이라는 단어가 총 38회 언급됐습니다. 그중 주요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글로벌 산업계가 마주한 장애물, 석탄
ASML은 재생에너지의 사용을 늘리는 것과 더불어 에너지 사용량 자체를 줄이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보고서에선 “이를 통해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고만 밝혔지만, 에너지 사용량의 절감은 제한적인 재생 전력을 두고 Scope 2 배출을 줄이기 위해서 필수적입니다.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지 않고서는 계속해서 시장의 수요가 늘어나 공급이 달는 재생 전력을 조달하기 어려우니 말이죠.

더불어 “에너지전환은 반도체가 화석연료 기반 에너지 생산에서 풍력,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로의 글로벌 전환을 가능케 하는 핵심 시장 동력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도 덧붙였습니다., 반도체 자체가 재생에너지로의 에너지전환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겁니다. 각종 국제 기준에 맞춰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펴내는 기업들은 기후변화 그 자체와 기후변화로 인한 대응이 자사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해야 합니다. ASML은 재생 전력을 확보하는 것 자체는 ASML에게 도전이자 일종의 리스크일 수 있으나, 반대로 재생에너지의 확대가 비즈니스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평가한 것입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글로벌 산업계가 마주한 장애물, 석탄
ASML은 자사의 밸류 체인 전반에 걸쳐서도 “100% 검증 가능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이끌겠다”면서도 한계점을 명시했습니다. ASML의 “Scope 3 배출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하청기업의 부품 생산 및 납품 과정이 아닌, 고객사의 자사 장비 사용 과정”이라며 “고객사가 항상 100% 재생 전력을 사용할 수 있지 않다”고 언급한 것입니다. 이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희망찬 내일'과 '이를 위한 열정'만을 담아내는 것이 아닌, '불편한 진실'과 '한계점' 또한 명확히 담아내야 한다는 점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러한 연차보고서를 'ESG 홍보 브로슈어'가 아닌 '지속가능경영보고서'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이어 구체적인 2025년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Scope 1과 Scope 2 배출의 넷 제로를 달성하고, 구매(소비)하는 전력의 100%를 재생 전력으로 하겠다는 목표 말입니다. ASML은 민간 이니셔티브인 RE100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이미 2023년 사용하는 전력의 91%가 재생 전력인 상황입니다. 2021년에도 그 비중은 92%나 됐고요. Scope 2 배출의 넷 제로가 임박한 만큼, '2025년 넷 제로'라는 강력한 목표를 제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ASML이 이용하는 설비나 건물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해 유럽과 미국, 한국 등의 최신 친환경 건축 표준을 적용하고 있다며, 한국 내 ASML 사업장에선 자체적으로 재생 전력을 생산하는 데에 투자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ASML의 보고서에서 우리나라가 등장하는 것은 이 대목만이 아닙니다. 앞선 연재에서 “RE100 이행이 가장 어려운 나라”로 한국이 꼽혔던 것처럼, ASML 또한 한국의 열악한 상황을 추가로 언급했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글로벌 산업계가 마주한 장애물, 석탄
ASML은 본사가 위치한 네덜란드뿐 아니라 해외 사업장에서도 적극적으로 재생 전력을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자국 내에선 10년 장기 녹색전력구매계약을 맺었고, 타이완에서도 지난해 장기 PPA를 체결했죠. 이를 통해 2025년 말까지 타이완 사업장에서 100% 재생 전력 사용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습니다. ASML은 이미 미국과 중국 사업장에선 100% 재생 전력을 사용 중인 상황이고요.

이를 설명하면서 ASML은 “신뢰할 수 있는 재생 전력이 거의 없는 한국에서 계속해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고 서술했습니다. “한국 내 재생에너지 확보를 위한 대안을 계속 찾아볼 것”이라며 “그럼에도 한국에서의 넷 제로 목표 달성이 어렵다면, 상쇄 배출권을 활용할 것”이라고 덧붙였고요. 그러면서, 하청업체와 고객사를 포함한 파트너들의 감축을 통해 Scope 3 배출 또한 줄여나가겠다는 포부를 나타냈습니다. “ASML은 파트너들과 온실가스 감축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관련 지식 및 기술을 공유하며, 전 세계적인 재생에너지 확대를 도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이죠. 한국의 에너지 정책이 단순히 국내 반도체 기업과 같은 고객사의 배출 차원을 넘어 ASML 자체의 배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국내 한 학회는 이러한 ASML의 보고서와 그에 따른 국내 보도와 관련해 이례적으로 보도자료를 배포했습니다. 한국원자력학회는 “국내에서 ASML이 탈원전을 선언했다는 요지의 사설까지도 등장했다”며 “(보고서에선) RE100이라는 표현도, ASML이 천연가스나 원전 없이 재생에너지만으로 넷 제로를 달성하겠다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고, “ASML은 재생 전력의 EAC(Energy Attribute Certificate, 에너지 인증서)를 구매해 이를 실제 소비한 전력인 것으로 장부상 상계 처리할 뿐”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글로벌 산업계가 마주한 장애물, 석탄
실제, ASML은 연례 보고서에서도, 자체적인 ESG 지속가능 전략에서도 원자력발전에 대한 언급 자체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고객사가 항상 100% 재생 전력을 사용할 수 있지 않다”며 한국에서의 재생에너지 확보를 위해 직접 투자를 하는 등 노력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넷 제로 달성이 어렵다면 상쇄 배출권을 활용할 것”이라고 강조했죠. 또한, RE100 이니셔티브에 가입하지 않은 만큼, RE100이라는 표현 또한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이 학회의 설명에서도 오류는 존재합니다. 원전에 대한 ASML의 가치 판단과 상관없이, 자사의 Scope 2 배출의 넷 제로 전략에 있어 ASML이 공개적으로 제시한 옵션은 '100% 검증 가능한 재생에너지'였습니다. “천연가스나 원전 없이, 재생에너지만으로 넷 제로를 달성하겠다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는 설명이 무색해지는 이유입니다.

또한 학회의 “ASML도 자사 시설을 가동하는데 Scope 1에서 천연가스를 사용하고 있다”는 설명도 오해를 부르기 쉽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ASML은 Scope 1과 2, 3에 이르기까지 각 Scope별 감축목표를 세웠고, 재생에너지가 거론된 부분은 Scope 2에 해당합니다. 원자력이든 재생이든 발전원을 통해 조절할 수 있는 배출 섹터는 Scope 2뿐이고, ASML은 재생 전력을 통해 Scope 2 감축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2021~2022년 Scope 1 배출(2021년 19.3kt, 2022년 17.3kt)보다도 많았던 Scope 2 배출(2021년 20.1kt, 2022년 20.8kt)은 2023년 15.9kt으로 Scope 1 배출(19.2kt)보다도 적을 수 있었습니다. 학회가 꼬집은 Scope 1 배출의 경우 별도의 계획에 따라 감축을 진행할 예정으로, 이는 발전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용이죠.

[박상욱의 기후 1.5] 글로벌 산업계가 마주한 장애물, 석탄
지난 연재에서, 삼성전자의 Scope 2 배출(2022년 9,081kt)이 Scope 1 배출(2022년 5,972kt)의 1.5배를 넘는 수준이라고 설명해드린 바 있습니다. 또 다른 반도체 기업인 SK하이닉스의 경우에도, Scope 2 배출은 Scope 1 배출을 압도하고 있죠. 업종은 다르지만, 우리나라 수출의 또 다른 핵심인 현대자동차의 경우에도, Scope 2 배출이 Scope 1 배출의 2.6배를 넘기는 등 기업의 온실가스 감축에 있어 무탄소 전원이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죠. ASML의 Scope 3 배출에 해당하는 우리나라의 반도체 기업의 경우, 재생에너지든 원자력이든 무탄소 전원을 최대한 확보해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또, 비단 반도체 기업이 아니더라도, 실제 RE100에 가입하진 않았더라도 '100% 재생 전력 사용'을 목표로 하는 기업 또한 다수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고요.

또한, EAC는 학회의 주장처럼 그저 “장부상 상계 처리할 뿐”인 방법이 아닙니다. EAC나 PPA는 기업이 무탄소 전원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주효한 방법입니다. 물리적으로 발전소와 사업장 간 직접 연결된 송전망을 구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죠. 때문에, 한수원 등도 “향후 CF100 활성화를 위해선 원자력 PPA를 포함하여 원자력 인증서 등 다양한 무탄소 전력거래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고, 관련 제도에 대한 논의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학회의 관점대로라면 이 논의는 당장 중단되어야 하고, 다수 기업이 탄소중립을 목표로 하는 시점인 2050년 이전에 현존 원전과 무탄소 전력 수요처 간의 전용 송전망 건설을 마치거나, 아예 용인, 평택 등 전력 수요가 많은 공장 인근에 기당 1.4GW 규모인 신형 원전을 건설하고, 상업 운전을 시작해야만 합니다. 기당 170MW 짜리의 원자로를 4기씩 묶은 소형 모듈러 원자로는 작은 크기만큼이나 적은 발전용량과 낮은 발전효율로 대규모 산단에의 전력 공급 목적엔 적합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글로벌 산업계가 마주한 장애물, 석탄
무탄소 발전원의 확대는 어느덧 분초를 다투는 일이 됐습니다. '2018년 대비 40% 감축'을 목표로 하는 2030 NDC(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의 목표 시점까지는 이제 불과 5년여밖에 남지 않았고, 여기서 전환(발전)부문의 경우, 2018년 대비 무려 45.9%의 감축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급망과 밸류체인 측면에서도 상·하 방향을 가리지 않고 감축의 압박이 본격화했습니다. 재생이든 원자력이든 무탄소 발전원의 확대를 통해 기업들로 하여금 PPA 등으로 Scope 2 감축의 숨통을 틔워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PPA나 EAC와 같은 제도 없이도 국가의 전력믹스 자체의 '탈탄소', 무엇보다 탈석탄을 빠르게 추진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기업의 규모나 자본, 기술 등 대응 여력에 상관없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중소, 중견기업 대상으로 공급망 실사나 기후공시 관련 상담 및 지원을 해주는 것도 좋지만, 애당초 업종 가리지 않고 다량으로 사용하고 있는 전력의 '성분', 즉 배출계수를 낮춰주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전국의 송배전망을 흐르는 전력의 60%가 화석연료 발 전력인 상황에서 무탄소 발전원 간의 편 가르기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발전 비중이 31.5%에 달하는 특정 무탄소 발전원이 아직도 한 자릿수 발전비중을 전전하는 다른 무탄소 발전원의 확산을 응원하고 지원하고, 신속한 탈석탄을 촉구는 것이야 말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무탄소 선배'로서 지금 해야 할 역할이자 국가 전력믹스의 탈탄소를 위해 주어진 의무일 것입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글로벌 산업계가 마주한 장애물, 석탄
박상욱 기자 park.lepremier@jtbc.co.kr
광고

JTBC 핫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