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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속편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유엔 수장의 경고

입력 2024-03-24 07:00 수정 2024-03-24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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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핵군축을 주제로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렸다. 〈사진 UN〉

3월 18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핵군축을 주제로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렸다. 〈사진 UN〉

“우리는 수십 년 만에 핵 전쟁의 위험이 최고조에 달한 상황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지난 18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안전보장이사회. 핵 군축을 주제로 열린 회의에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구테흐스 사무총장의 발언은 단호했습니다.

“오늘날 핵무기의 위력과 사거리, 은밀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한 번의 실수, 한 차례 계산 착오, 성급한 행동 한 번이면 핵무기가 발사될 수 있습니다.'지구 (Doomsday Clock)'는 모두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똑딱'거립니다. 인류는 '오펜하이머'의 속편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AFP 통신은 “유엔 사무총장의 핵 위기 발언이 수십 년만에 강력한 수위”라고 평가했는데요. 유엔 지도자가 핵전쟁으로 인류가 종말할 것이라고 단언한 건 다소 충격적입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왜 지금 이렇게 핵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선 걸까요.

러시아, 위성 공격 우주 핵무기 개발
일단 이날 회의에서 린다 토머스 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어떤 국가도 우주 공간에 핵무기를 배치하거나 개발하지 못하도록 하는 안보리 결의안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지구 궤도에 핵무기를 배치하는 시도는 전례가 없고 위험하며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핵무기의 위협이 우주 공간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건데, 안보리 결의안까지 요구한 건 미국이 구체적인 움직임을 포착했다는 뜻입니다.

러시아가 위성 요격용 핵무기를 지구 궤도 상에 배치할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사진 아틀랜틱 카운슬〉

러시아가 위성 요격용 핵무기를 지구 궤도 상에 배치할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사진 아틀랜틱 카운슬〉

문제가 처음 제기된 건 지난달 13일 미 하원 정보위원회였습니다. 미국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러시아가 핵을 탑재한 무기를 우주 궤도에 진입 시켜 위성을 공격하는 무기를 개발했으며, 일정 궤도와 반경 내 들어 있는 위성을 한꺼번에 마비시키려 한다는 겁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언론에 미 백악관은 “우리는 매일 다양한 위협과 도전을 받고 있다"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 유엔 대사가 일본과 안보리 결의안 추진을 공개하면서 의혹은 사실이 됐습니다.


미 전문가들은 “우주에서 핵폭발이 발생하면 군 위성이 사용하는 궤도에 방사능이 퍼져 몇주 혹은 몇달 이상 위성의 성능이 저하될 수 있으며 수천 대의 민간 위성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어 대량 살상 무기나 다름이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 등 114개국이 비준한 '우주 조약'(Outer Space Treaty)은 “국가는 핵무기 또는 대량살상무기를 궤도 또는 천체에 배치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지만 강제력은 떨어집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주에 핵무기를 배치하는 것에 지금도 반대한다. 우리는 미국을 포함해 다른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수준의 우주 역량을 개발했을 뿐”이라는 말로 넘어갔습니다.

미ㆍ러 핵무기 감축 협상 중단... 2026년 만료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핵 개발을 통제해 오던 최소한의 안전 장치마저 사라진 상황은 위기를 더욱 고조시킵니다.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은 2011년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메드베데프 전 러시아 대통령이 합의한 포괄적 핵무기 감축 협정입니다. 양국이 핵탄두를 1550개 이하로 제한하기로 합의하면서 각각 6000개가 넘던 핵탄두는 2018년 기점으로 70% 이상 줄었습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이동시 사전 통보, 연 10회 현장 사찰 등 상호 핵 전력 감시 체계도 가동됐죠.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1년 만인 2023년 2월 푸틴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뉴스타트' 협정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이 이유였습니다. 미국이 조건없는 협정 재개를 요구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푸틴 대통령은 지난 17일 5선을 확정짓고 난 뒤 “러시아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충돌하면 3차 세계대전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발언 수위를 더 높였습니다.

지난해 9월엔 “서방이 우크라이나에 군대를 보내면 핵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발언까지 했죠.

뉴스타트 협정 만료 시점이 2026년 2월이지만 중단된 협정이 재개될 가능성은 현재로선 희박합니다.

중국 핵탄두, 2035년 미ㆍ러 수준 근접
중국의 급격한 핵 군비 증강은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미 국방부는 지난해 보고서에서 중국이 보유한 핵탄두를 약 500여 개로 추정하면서 2035년에는 1500개 수준으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뉴스타트 협정에 따라 미국과 러시아의 핵탄두 수는 2018년 이후 1550개 이하로 제한돼 왔다.

뉴스타트 협정에 따라 미국과 러시아의 핵탄두 수는 2018년 이후 1550개 이하로 제한돼 왔다.

약 10년 뒤 중국이 현재 미국과 러시아의 핵탄두 보유 수준에 근접하게 된다는 전망이죠.

최근 존 아퀼리노 미 인도태평양사령관은 “중국이 핵무기를 2020년 대비 100% 늘린 게 가장 우려된다”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대만과의 통일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있는 중국이 미국 개입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핵 전력 강화를 서두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핵 군축 대상에 포함돼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선 미ㆍ러 수준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고 군축 협의 대상도 아니라며 회피하고 있습니다.

결국 핵무기 최대 보유국인 미ㆍ중ㆍ러 3개국간 협의 채널도 없이 '마이웨이'를 가고 있는 셈입니다.


쿠테흐스 사무총장이 “자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면 핵무기 수를 줄여야 한다”며 “가장 큰 핵무기 보유국인 미국과 러시아가 주도해야 하고 어떤 국가도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 않는다는 데 합의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 대화중단...'화약고'
드미트리 폴리안스키 유엔 주재 러시아 대사(왼쪽), 장쥔 유엔 주재 중국 대사.

드미트리 폴리안스키 유엔 주재 러시아 대사(왼쪽), 장쥔 유엔 주재 중국 대사.

드미트리 폴리안스키 유엔 주재 러시아 대사는 이날 안보리 회의에서 “핵무기 없는 세상이라는 목표는 현재로서는 상당히 먼 곳에 떨어져 있다”면서 “현 단계에서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은 전략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발언은 상당히 위태로워 보입니다.

핵 군축 논의는 고사하고 전략적으로 핵 개발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공식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쥔 중국 대사의 발언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장 대사는 “핵 정책과 핵무기 보유량이 크게 다른 국가들에게까지 동일한 핵 군축과 핵 투명성 의무를 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국제적 합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무리한 요구는 핵 군축을 막다른 길로 이끌 뿐”이라고 반발했습니다.

국제 사회에 아랑곳하지 않고 중국이 자체적으로 판단해 핵 전력을 보강하겠다는 속내입니다.

그린필드 미 대사가 ”미국은 당장 러시아 및 중국과 군비 통제 논의에 참여할 의향이 있다. 두 나라가 지금 해야할 일은 성실하게 테이블 나오는 것“이라고 했지만 '메아리'에 그쳤습니다.


가우하르 무카트자노바 핵군축ㆍ비확산프로그램(IONP) 대표는 “국제 평화의 일차적 책임을 지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사실상 서로 대화를 하지 않고 있다. 핵 확산 방지는 이들 국가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유엔 사무총장의 경고는 빙산의 일각인지도 모릅니다.

박성훈 기자 park.seonghun@jt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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