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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홍대 한복판 "사정 여의찮으면 대접"…마음 내어주는 돈가스집

입력 2023-12-15 22:11 수정 2023-12-15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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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교동 한 돈가스 가게 앞에 붙은 안내문. 〈사진=김휘란 기자〉

서울 동교동 한 돈가스 가게 앞에 붙은 안내문. 〈사진=김휘란 기자〉


"힘든 하루를 살다가도 이곳에서 돈가스를 먹고 다시 힘을 얻어 열일(열심히 일)하러 간 적이 얼마나 많은지…앞으로도 행복해지러 자주 오겠습니다."

종일 부슬비가 내린 15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한 돈가스 가게에는 늦은 시간까지 손님들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소박하고 평범한 이 가게 앞에는 수년째 특별한 안내문이 붙어 있는데요.

"돈가스를 드시고 싶은데 사정이 여의찮으신 분은 들어오십시오. 대접하겠습니다."

흰 종이에 큼직하고 또렷하게 적힌 문구. 35세 차주환 씨가 운영하는 돈가스 가게를 직접 찾아가봤습니다.

8년째 '돈가스 나눔'…"부모님 뜻 이어받아"


"어서 오세요!"

가게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우렁차게 인사를 건네는 차씨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바쁜 식사시간을 피해 갔는데도 여러 명의 '혼밥' 손님들이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벽면 한쪽에는 수년 전 차씨의 선행을 알린 신문기사와 손님이 남기고 간 감사의 쪽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지난 2015년 가게를 연 차씨는 이곳에서 사정이 어려운 손님들에게 8년째 돈가스를 대접해 오고 있습니다.

차주환 씨가 손님들이 떠난 자리를 정리하고 있다. 〈사진=김휘란 기자〉

차주환 씨가 손님들이 떠난 자리를 정리하고 있다. 〈사진=김휘란 기자〉


차씨는 "근처에서 부모님도 돈가스 가게를 운영하고 계신다"며 "저보다 훨씬 앞선 지난 1999년부터 24년째 이런 선행을 하셨고, 저도 그 뜻을 이어받아 가게를 열 때부터 이 알림문을 붙여놓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차씨 가족은 IMF 직후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일상에서 타인을 도울 방법을 생각하다가 이런 나눔을 실천하게 됐습니다. 가진 것을 당연하게 누리지 않고, 특별한 것이 아니더라도 베풀 줄 아는 마음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차씨 부모가 운영하는 가게에도 붙어 있는 안내문. 〈사진=김휘란 기자〉

차씨 부모가 운영하는 가게에도 붙어 있는 안내문. 〈사진=김휘란 기자〉


학생부터 노인까지…'악용' 손님은 정중히 거절


차씨의 '돈가스 나눔'을 받는 연령대는 다양합니다. 학생부터 노인까지, 보통 혼자서 이곳을 찾습니다. 차씨는 "(그런 분들은) 누가 봐도 어려워하는 모습이 보인다"며 "메뉴는 기본 돈가스를 대접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와 관련해선 "좋은 추억도 많고, 나쁜 기억도 있다"고 운을 뗐습니다.

"한번은 말이 어눌하고 한쪽 팔도 불편해 보이는 장애인이 동생과 함께 먹고 싶다며 돈가스 포장을 부탁했어요. 그렇게 돈가스를 포장해 가고 며칠 뒤 사과 10개 정도가 든 봉지를 들고 나타난 거예요. 따뜻한 마음이 담긴 사과를 가족, 직원들과 맛있게 나눠 먹었습니다."

차씨가 사정이 어려운 분들에게 대접하는 기본 돈가스. 〈사진=김휘란 기자〉

차씨가 사정이 어려운 분들에게 대접하는 기본 돈가스. 〈사진=김휘란 기자〉


또 스타일이 멋졌던 한 중년의 남성 손님도 떠올렸습니다.

"손님이 스케이트보드를 타다가 지갑이 든 가방을 잃어버렸다며 돈가스를 먹을 수 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평소 인상착의를 굳이 따지지 않아서 사연이 있으셨던 그날도 돈가스를 드렸는데, 한 달 뒤쯤 가방을 찾았다며 그때 먹은 것까지 전부 계산하고 가셨어요."

차씨를 힘들게 했던 기억으로는 일주일에 다섯 번이나 가게를 찾아오는 등 그 빈도가 너무 잦은 손님들이었습니다. 차씨는 "그럴 땐 정중하게 말씀드려요. 제가 순수하게 배고프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선행을 하는 건데 부디 악용하지 말아달라고요"라며 웃어보였습니다.

"힘든 하루 끝에 힘 얻어…행복 찾는 곳"


나눔을 베푼 손님의 마음만 사로잡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단골손님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줬다며 차씨가 보여준 상자에는 핫팩과 직접 만든 초콜릿, 양초가 정성스럽게 놓여 있었습니다.

선물과 함께 온 편지에는 "한결같이 맛있는 돈가스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든 하루를 살다가도 이곳에 와서 돈가스를 먹고 다시 힘을 얻어 열일하러 간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앞으로도 행복해지러 자주 오겠습니다"라는 고마움이 적혔습니다.

차씨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단골손님의 선물과 편지. 〈사진=김휘란 기자〉

차씨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단골손님의 선물과 편지. 〈사진=김휘란 기자〉


어느 여름날 다녀간 손님의 쪽지에는 "마음 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지나가다가 오늘 야근하는 팀원에게 (돈가스를) 주고 싶어서 들렀습니다. 더운 날씨, 열나는 조리기구와 씨름하며 만들어 주신 노고를 생각하며 감사하게 잘 전달하겠습니다. 건강하세요"라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이날 가게에서 저녁 식사를 한 28세 김용진 씨는 "지나다니면서 '이런 일도 하시는구나' 싶어 언제 한번 와봐야겠다고 생각했다"며 "그렇게 6번 정도 왔던 것 같은데 워낙 친절하셔서 단골들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남은 돈가스를 포장해 나온 70세 김재희 씨도 "아주 든든하고 맛있게 먹었다"며 "좋은 일을 하신다니 더 자주 와야겠다"고 전했습니다.

모두 같은 '사람'…"대접 계속 이어갈 것"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차씨는 "어렸을 때부터 봉사를 많이 했다"고 밝혔습니다.

차씨는 "장애인 시설에서 봉사를 한 적이 있는데,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던 형이 있었다"며 "그런데 어느 날 그 형이 사회복지사의 통역을 통해 '내가 쓴 소설이다'라며 글을 보여주는데 그때 '아, 이들도 같은 사람이구나'를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저녁 시간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가게. 〈사진=김휘란 기자〉

저녁 시간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가게. 〈사진=김휘란 기자〉


본인의 행동이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지는 광경도 목격했습니다.

"어떤 손님들은 '나중에 오실 누군가에게 저도 대접을 해드리고 싶다'며 1인분을 더 계산하고 가기도 해요. 초반에는 미안해서 (그 돈을) 안 받기도 했는데, 이제는 감사히 받고 그만큼 더 잘해드리려고 합니다."

차씨는 "사업을 시작하고 보니 따로 시간을 내 봉사를 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워 실질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고민을 많이 했다"며 "앞으로도 맛있게 돈가스를 만들며, 나눔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고 덧붙였습니다.

안내문 옆에서 웃어 보이는 차주환 씨. 〈사진=김휘란 기자〉

안내문 옆에서 웃어 보이는 차주환 씨. 〈사진=김휘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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