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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욱의 기후 1.5] 노동계, 농민, 청소년 '쏙' 빠진 탄중위…행정소송 대상 되다

입력 2023-07-31 08:01 수정 2023-07-31 08:07

'먼 미래'에서 '내 일'로 찾아온 기후변화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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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미래'에서 '내 일'로 찾아온 기후변화 (194)

1998년 4월, 한국 정부는 기후변화협약에 대응하기 위한 범정부 대책기구를 구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국무총리를 기구의 위원장으로 하고, 재정경제부를 비롯한 10개 부처로 구성되는 조직을 꾀한 겁니다. 당시 발표에 따르면, 이 기구는 ① 온실가스 배출 저감 계획을 수립하고, ② 에너지 소비 절약, ③ 청정에너지 보급 확대, ④ 에너지 저소비형 산업구조로의 전환을 추진할 계획이었죠. 선진국과는 달리, 경제성장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국제사회의 온실가스 감축 의무화 움직임에 대응해왔었는데, 그러한 감축 압박이 더욱 거세질 것이며, 더는 이와 같은 이유로 감축 의무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이 기구는 초기 원대한 포부와는 달리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이 범정부 대책기구의 존재 여부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거의 남지 않을 정도로요.
 
2021년 10월 8일, 대통령소속 탄소중립위원회가 2030 NDC(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 정부안을 공개했다.

2021년 10월 8일, 대통령소속 탄소중립위원회가 2030 NDC(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 정부안을 공개했다.

그로부터 13년 후, 한국 정부는 이와 같은 기구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바로, 탄소중립위원회입니다. 국무총리와 민간위원장의 '공동 위원장'이라는 지휘체계 아래에 ① 기후변화, ② 에너지혁신, ③ 경제산업, ④ 녹색생활, ⑤ 공정전환, ⑥ 과학기술, ⑦ 국제협력, ⑧ 국민참여 총 8개 분과를 뒀습니다. 또, 각 분과에서 논의한 내용을 협의하기 위해 협의체와 탄소중립시민회의를 설치했죠.

2021년 5월, 서울에서 열린 P4G 정상회의의 개최를 하루 앞두고 출범한 탄소중립위원회는 출범과 함께 정신없는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습니다. 출범 석 달 만에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내놔야 했고, 그로부터 한 달여 만에 2030 NDC(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 상향안을 마련해야 했으니 말입니다. 국가 차원의 탄소중립 선언 이후, 구체적인 로드맵은 존재하지 않던 상황에서 탄중위는 속히 로드맵을 제시했어야 했습니다. 또, 국제사회에 새로 NDC를 제시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고요.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과 그 결과물에 대해선 앞선 91번째 연재 〈[박상욱의 기후 1.5] 뚜껑 열린 탄소중립, 결말만 담긴 시나리오…동상이몽 결정판?〉과 100번째 연재 〈[박상욱의 기후 1.5] “온실가스 40% 감축”한다더니…실상은 30% 감축?〉에서 상세히 전해드린 바 있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노동계, 농민, 청소년 '쏙' 빠진 탄중위…행정소송 대상 되다
2030 NDC의 업데이트로부터 1년 후, 탄소중립위원회는 2기 체제로 개편됐습니다. 개편과 함께 기구의 이름은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로 바뀌었죠. 바뀐 건 이름만이 아니었습니다. 대대적인 조직의 슬림화가 이뤄졌습니다. 우선, 8개였던 분과는 ① 온실가스 감축, ② 에너지·산업 전환, ③ 공정전환·기후적응, ④ 녹색성장·국제협력 4개 분과로 축소됐습니다. 얼핏, 8개였던 기존 분과를 2개씩 짝지어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국민참여'라는 이름은 분과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됐죠. 참여는 분과에서만 사라지는 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산업계와 노동계, 농어민과 시민사회, 청년, 지자체 등 이해관계자들이 함께하는 협의체와 탄소중립시민회의 역시 사라졌습니다.

분과가 줄어들면서 위원회에 참여하는 민간위원의 수 또한 75명에서 32명으로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단순히 '숫자의 감소' 이상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위원들의 명단을 살펴보면, 그 변화가 어떤 변화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노동계, 농민, 청소년 '쏙' 빠진 탄중위…행정소송 대상 되다
1기에선 분과별로 학계나 연구기관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뿐 아니라 시민사회나 청년, 종교, 노동계, 산업계를 대표하는 이들이 골고루 포진되어 있습니다. 반면 2기의 구성은 상대적으로 심플합니다. 전문가와 기업, 그리고 대형 기관 소속으로 분류할 수 있죠. 환경단체들은 이러한 구성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 바 있습니다.

지난 3월, 환경운동연합은 탄녹위 앞에 피켓을 들고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위법 구성”, “민주적 절차 실종”, “당사자 배제”, “밀실 논의”, “기업 민원 창구” 등은 그 피켓에 적힌 문구들이었습니다. 이외에도 각종 규탄 성명과 집회가 열렸지만, 실질적으로 탄녹위 구성의 변화를 불러오진 못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7월 초, 피켓 문구 중 하나이기도 했던 “위법 구성”을 묻는 행정소송이 제기됐습니다. 소송 주체는 탄녹위를 규탄했던 환경단체가 아니었습니다. 당장 에너지전환 정책의 당사자인 전력산업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지난 11일, 전력연맹이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정의로운 전환 소송 기자회견을 열었다.

지난 11일, 전력연맹이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정의로운 전환 소송 기자회견을 열었다.

전국전력산업노동조합연맹(전력연맹)은 장맛비가 쏟아지던 지난 11일,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소송을 제기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정부는 법과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제2기 탄녹위 구성 과정에서 탄소중립기본법이 보장하고 있는 민주적 참여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입니다. 이는 국내법 효력을 갖는 파리협정의 정의로운 전환 원칙과도 상충합니다. 위원회 구성 자체가 노동자 대표의 참여를 배제한 채로 진행됐고, 기본 계획의 정책 방향은 기업을 위한 혜택은 있지만 노동자들을 위한 실효적인 계획은 없습니다.

우리는 법이 보장하는 정의로운 전환의 중심에서 침해된 노동자의 권리를 되찾고, 탄소중립 정책 수립의 주체로 나설 것입니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해 위원회를 재구성하고, 노동자 대표의 사회적 대화 참여를 통해 기본계획을 전면 재수립할 것을 촉구합니다.”
최철호 전력연맹 위원장

1기 위원회 당시 노동계 대표로 참여했던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전력연맹의 정의로운 전환 소송이 정부의 안일한 기후위기 정책에 일침을 가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이번 소송을 통해 전환부문에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수많은 노동자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될 수 있도록 정의로운 전환의 주체인 노동자들이 탄소중립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과연, 이들이 행정소송에 나선 배경이 된 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법엔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까. 법조문을 살펴봤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노동계, 농민, 청소년 '쏙' 빠진 탄중위…행정소송 대상 되다
“탄소중립 사회로의 이행과 녹색성장의 추진 과정에서 모든 국민의 민주적 참여를 보장한다”는 것은 기본원칙 중 하나였습니다. 혹여나 '이는 큰 줄기의 방향성을 의미할 뿐, 실제 위원회 구성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이 나올까 싶어 기본법을 더 살펴보니, 탄녹위의 설치에 관한 내용 또한 기본법의 법 조항으로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노동계, 농민, 청소년 '쏙' 빠진 탄중위…행정소송 대상 되다
“위원을 위촉할 때에는 아동, 청년, 여성, 노동자, 농어민, 중소상공인, 시민사회단체 등 다양한 사회계층으로부터 후보를 추천받거나 의견을 들은 후 각 사회계층의 대표성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 제15조(2050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의 설치)

위원의 위촉에 대해 기본법은 너무도 명확히 명문화해놨습니다. 이는 1기 각 분과별 위원 구성을 설명할 수 있는 대목이자, 2기 위원 구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소송의 원고측소송 대리인인 법무법인 율립의 김유정 변호사는 “2015년 채택된 파리협정이 국회에서 비준되며 국내법적인 효력을 갖게 됐고, 이후 기본법을 제정하면서 정의로운 전환의 기본 원칙이 명시됐다”며 “기본법 15조 5항에서도 위원회 구성 시각계각층의 의견을 들어 후보 추천을 받거나, 이들의 의견을 들어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명시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김 변호사는 “하지만 2기 탄녹위는 이러한 후보 추천권이라든가 의견을 제시할 권리가 배제된 채 구성됐다”며 “위원회 구성 자체가 매우 위법한 것으로, 명확하게 탄소중립 기본법에 위반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왼쪽부터) 최철호 전력연맹 위원장과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이 소장을 들고 있다.

(왼쪽부터) 최철호 전력연맹 위원장과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이 소장을 들고 있다.

전력연맹은 이번 소송을 통해 법원에 비단 탄녹위 구성의 위법성을 묻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위법하게 구성된 위원회가 의결한 국가 기본계획인 〈제1차 국가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 또한 위법하다는 입장에 대해서도 법원에 판단을 요구했습니다. 김 변호사는 “위원회 구성이 위법할 경우, 그 위법하게 구성도니 위원회에서 의결한 의결 또한 위법하다고 판단한 판례가 있다”며 “이번 정의로운 전환 소송은 탄소중립 정책의 영향을 넘어 피해를 받게 되는 노동자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 비공개 의결의 위법성을 다투고자 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소송의 원고는 전력산업 노동자들이지만, 현재 위원회 구성에서 배제된 것은 그들만이 다가 아닙니다. 기후위기의 당사자인 청년도, 충분하고도 실현 가능한 대안 제시 없이 27.1%에 달하는 감축 부담을 짊어지게 된 농민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배제된 채, 전문가와 기업 및 대형 단체 관계자로 구성된 2기 탄녹위가 발표한 2030 NDC는 위원 구성 문제에 의문을 더하게 만들었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노동계, 농민, 청소년 '쏙' 빠진 탄중위…행정소송 대상 되다
이미 국제사회에 제출된 국가 차원의 감축목표인 '2018년 대비 40% 감축'은 달라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각 부문별로는 감축 목표가 수정됐죠. 기존 감축목표에서도 주요 부문 가운데 유일하게 '10%대 감축목표'에 머물렀던 산업부문의 감축 목표는 14.5%에서 11.4%로 줄어들었습니다. 그 부담은 결국, 고스란히 전환(발전)부문에 전가됐고요. 발전부문의 감축은 곧, 화석연료를 이용한 발전설비의 폐지나 축소를 의미합니다. 이미 '탈석탄'이라는 정책 방향은 제시됐는데, 이들의 재교육이나 일자리 전환을 다루는 '정의로운 전환'은 진전이 없던 상태에서 이들의 '일자리 상실'은 더욱 가까워진 셈입니다.

'정의로운 전환'을 두고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기후위기 대응의 핵심 요소입니다. 국제사회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그렇습니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은 핵심이 되는 키워드들의 정의를 내렸는데, “기후정의”와 “정의로운 전환”도 그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노동계, 농민, 청소년 '쏙' 빠진 탄중위…행정소송 대상 되다
“기후정의”란 기후변화를 야기하는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사회계층별 책임이 다름을 인정하고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의사결정 과정에 동등하고 실질적으로 참여하며 기후변화의 책임에 따라 탄소중립 사회로의 이행 부담과 녹색성장의 이익을 공정하게 나누어 사회적·경제적 및 세대 간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을 말한다.

“정의로운 전환”이란 탄소중립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적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지역이나 산업의 노동자, 농민, 중소상공인을 보호하여 이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담을 사회적으로 분담하고 취약계층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정책방향을 말한다.

2기에서 배제된 청년 역시 대표적인 이해관계자일뿐 아니라 2기 위원회가 내놓은 로드맵에 큰 영향 또는 피해를 입게 되는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노동계, 농민, 청소년 '쏙' 빠진 탄중위…행정소송 대상 되다
2기 탄녹위는 2030년까지 연간 배출량의 로드뱁을 제시했습니다. 문제는, 가까운 미래엔 '정중동'에 가까운 1%대 감축만을 이어가다 2030년 한 해에만 무려 17.5%를 줄인다는 '미래에 책임을 전가한' 로드맵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온실가스 배출 곡선의 문제점에 대해 178번째 연재 〈[박상욱의 기후 1.5] “기후 대응 남은 시간, 10년뿐”…'조삼모사', 'NIMT'로 빛바랜 많은 이들의 노력(하)〉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 이내로 제한하려면, 막연히 온실가스를 줄이고, 2050년에 탄소중립만 달성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대기중 온실가스 농도에 비례해 기온이 오르내리는 만큼, 수은주가 1.5℃를 가리키기 전까지 우리가 뿜어낼 수 있는 온실가스의 양은 이미 정해져있는 것이죠. 즉, '2030년에 감축률 40% 달성', '2050년에 순배출량 제로'를 이룩한다 한들, 그사이 뿜어낸 온실가스의 양이 우리에게 남은 '탄소예산'을 초과할 경우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청년 세대와 아이들이 오롯이 짊어져야만 하고요.

'조직의 슬림화'와 '전문가 중심의 신속한 의사결정'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극대화해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가장 많은 재생에너지 발전설비를 설치하고 있는 나라도 실제 있습니다. 우리와 그리 멀지 않은, 한반도 서쪽에 위치한 큰 나라가 그렇습니다. 절대자의 교시 한 마디에 태산이 태양광 패널로 뒤덮이고, 곳곳에 풍력 터빈이 놓이죠. 이 한 나라에서 전 세계에 설치되는 전체 재생에너지 발전설비보다 더 많은 용량의 설비가 설치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문제는, 이들에겐 그런 전환의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전면 배제됐다는 점입니다.

우리 정부가 추구하는 방향성이 서쪽의 이 큰 나라와 같은 것은 아닐 겁니다. 각계각층의 의견을 듣고, 논의하고, 설득하고, 공감하고, 반영하는 과정은 답답할 수도, 조금은 더딜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배제한다면, 탄소중립과 녹색성장의 이행의 가장 근원적인 '동력'은 금방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노동계, 농민, 청소년 '쏙' 빠진 탄중위…행정소송 대상 되다
박상욱 기자 park.lepremier@jt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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