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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환의 중국은, 왜] #107. 어디 팔 데 있어?...배짱 튕기는 시진핑

입력 2023-05-26 06:57 수정 2023-05-26 08:53

러ㆍ중 새 천연가스 가스관,
'시베리아의 힘2' 협상 교착

우크라 침공 이후 서방 제재
유럽 시장 잃은 푸틴 궁지

믿고 의지할 중국 시장 뿐인데
시간 끌며 확답 안주는 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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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ㆍ중 새 천연가스 가스관,
'시베리아의 힘2' 협상 교착

우크라 침공 이후 서방 제재
유럽 시장 잃은 푸틴 궁지

믿고 의지할 중국 시장 뿐인데
시간 끌며 확답 안주는 시진핑

〈사진= JPT 캡처〉

〈사진= JPT 캡처〉

“그렇게 불 태워 없애느니 하루 빨리 협상을 타결하는 게 이익일 텐데, 러시아 사람들 참 질깁니다.”

러시아와 중국이 동시베리아의 천연가스 공급 협상을 벌이던 2010년대 초, 베이징의 한국 가스업계 관계자에게 중국 천연가스 기업 고위층이 해준 말입니다. 중국 측은 협상 레버리지를 강화하기 위해 한국ㆍ일본ㆍ대만 등 가스업계의 바이 파워를 끌어들이고 있었죠.

원유와 함께 발견되는 천연가스는 지상으로 뽑아져 올라오면 무거운 성질 때문에 낮게 깔려 인화 위험이 높습니다. 따라서 액화하거나 파이프로 수송할 게 아니면 태워버립니다.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당시 러시아는 가격 협상에서 정말 끈질기게 공급 조건 원안을 고수해 협상이 수년째 교착상황이었다고 하는데요. 파이프 건설 비용이나 가격에서 상술에 도가 튼 천하의 왕서방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니 러시아 '불곰'의 뚝심 하나는 대단하구나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국 두 나라는 10여 년 간의 마라톤 협상 끝에 2014년 가스 공급 조건을 타결 짓고 3000km 길이의 '시베리아의 힘' 가스관 건설에 착수합니다. 개통은 2019년 한겨울이었죠.


시베리아의 힘 1,2 노선도 〈그래픽=가즈프롬 캡처〉

시베리아의 힘 1,2 노선도 〈그래픽=가즈프롬 캡처〉

시베리아의 힘이 개통될 때만해도 '시베리아의 힘2' 협상 타결은 가시권에 있는 게 아니냐는 보도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4년이 흘렀습니다. 이 협상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걸까요.


25일자 파이낸셜타임스(FT)에서 협상 내막의 일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FT는 지난주 미하일 미슈스틴 러시아 총리가 '시베리아의 힘2'에 대한 중국 측의 어떤 확답도 얻지 못한 채 모스코바로 돌아갔다고 보도했습니다.

지난 3월 시진핑 중국 주석이 3연임을 결정하고 첫 해외 순방지로 러시아를 택했을 때도 이 가스관 건설 이슈가 테이블에 올랐다고 FT는 전했습니다.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푸틴은 “시베리아의 힘2 천연가스 가스관 건설에 합의했으며 프로젝트와 관련된 여러 변수에 대해 얘기가 끝났다”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공동성명은 어땠을까요. “계속 연구하고 협의한다”고 돼 있었습니다. 계속 협상을 한다는 정도 선에서 그친 겁니다.

이번에는 변수 얘기도 없이 러시아 총리가 돌아갔다고 하니까 윤곽 잡기도 녹록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러시아는 2019년 개통한 '시베리아의 힘' 가스관 등을 비롯해 중국으로 보내는 새로운 천연가스 인프라 건설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 국영 가스기업인 가스프롬의 직원이 POS-1 가스관을 점검하는 모습.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러시아는 2019년 개통한 '시베리아의 힘' 가스관 등을 비롯해 중국으로 보내는 새로운 천연가스 인프라 건설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 국영 가스기업인 가스프롬의 직원이 POS-1 가스관을 점검하는 모습.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시베리아의 힘2′ 는 러시아와 몽골, 중국을 잇는 2600㎞의 가스관을 건설해 중국에 매년 500억㎥의 천연가스를 수출한다는 가스관 건설사업입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의 제재로 전체 천연가스 수출량의 80%를 차지하는 유럽 판로가 막힌 러시아. 지난 1년간 내심 기대했던 건 '시베리아의 힘2' 협상 타결이었습니다.

시베리아의 힘2 노선도. 〈그래픽= FT 캡처〉

시베리아의 힘2 노선도. 〈그래픽= FT 캡처〉

반면 중국 입장에선 판로가 막힌 러시아가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경제적 의존 대상이 중국이라는 명백한 사실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더 명확해졌다는 겁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인 지난 2018년 유럽에 수출한 천연가스(파이프라인가스ㆍPNG)는 200bcm, 지난해는 100bcm으로 반 토막이 난 상태죠.

푸틴을 피 말리게 하는 중국의 상술이 가해집니다. 시간을 끌고 가타부타 답을 안주는 겁니다. 러시아가 제시하는 조건에 이렇다할 의사 표시를 안 하면서도 협상 분위기는 깨지 않고 이어갑니다.

현 상황에서 시간은 중국 편이니까요.

24일 관영 신화통신은 시진핑이 미슈스틴 러시아 총리를 만나 양국 간 경제협력 강화 의지를 밝혔다고 보도했습니다. 전형적인 상황 관리용 멘트입니다. '실질적인 성과가 없지만 협력 의지는 있다'를 강조하면서 협상이 궤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겁니다.

24일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이 미하일 미슈스틴(왼쪽) 러시아 총리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 AFP,연합뉴스〉

24일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이 미하일 미슈스틴(왼쪽) 러시아 총리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 AFP,연합뉴스〉

희망 고문에 빠진 푸틴은 다음 정상급 회담에서 진척을 기대해야 하는데, 관건은 우크라이나 전황일 겁니다. 확실한 승기를 잡지 못하는 한 협상의 칼자루는 시진핑이 쥐고 가는 판세를 뒤집기 어려운 형국입니다.

시간 외에도 중국이 유리한 협상 입지를 다질 수 있었던 복안이 있습니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오는 3개의 가스관입니다. 이 가스관을 통해 중국은 35bcm(1bcm=10억㎥)의 가스를 수입했습니다. 시베리아의 힘 16bcm과 비교하면 중국이 천연가스 수입원을 다각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주 끝난 중앙아시아 스탄 5개국과 중국의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네 번째 '라인D' 건설을 적극 옹호했습니다.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유럽 시장이 초토화 돼 대체 시장으로 중국만 쳐다볼 수 밖에 없는 궁색한 처지의 푸틴. 경제적으로 고립이 심화되고 있는 러시아가 중국에 매달리는 구도입니다. 인간 관계에서도 그렇지만 정글 같은 국제정치판에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의존이 심해지면 양국 간 균형이 무너집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지난 3월 22일 미 상원 외교위에서 중·러 관계를 정략결혼으로 평가하면서 "러시아가 '아랫사람(junior partner)'이 됐다"고 했었죠. 러시아,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왔을까요. 우크라이나 전쟁 오판이 부른 후과이니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는 처지입니다.

러시아의 뒷마당인 중앙아시아 스탄 정상들이 중국 안방으로 찾아가 상설 정상회의체에 합의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러시아와 중국의 미세한 균형이 기울었기 때문입니다.

18일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열린 중국 중앙아시아 5국 정상회의 환영 행사에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내외가 도착했다. 영접을 맡은 여성들이 용무늬 등불을 들고 안내하고 있다. 〈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18일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열린 중국 중앙아시아 5국 정상회의 환영 행사에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내외가 도착했다. 영접을 맡은 여성들이 용무늬 등불을 들고 안내하고 있다. 〈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블라디보스톡 항을 중국이 이용하도록 열어준 건 어떤가요. 시베리아의 힘2 협상 타결을 위한 당근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만큼 협상 상대의 유불리를 파고드는 극한 협상술이 시베리아 천연가스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습니다.

스케일의 사회주의? 19일 시안에서 열린 제1차 중국-중앙아시아 정상회의.〈사진= 신화, 연합뉴스〉

스케일의 사회주의? 19일 시안에서 열린 제1차 중국-중앙아시아 정상회의.〈사진= 신화, 연합뉴스〉

이 가스는 어디 갈 데가 없다(컬럼비아대 선임연구원 타티아나 미트로바,FT).


전시 협상력이 밑바닥에 떨어진 푸틴을 상대로 극한 협상을 강요하고 있는 시진핑. 가격 뿐 아니라 어떤 지정학적 선물 리스트를 내밀지 주목됩니다.

한반도의 운명에 직간접 영향을 미치는 유라시아의 두 지정학 플레이어간에 균형이 미세하게 한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측불가의 지각변동을 낳을 수 있습니다. 예의주시해야 합니다. 다음 칼럼에서 이어가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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