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버텨낼 기다. 반드시 헤쳐나갈 기다."
- 영화 '파친코'
자이니치 가족의
삶을 그린 < 파친코 >
일본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성시/자이니치 2세|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 : 가지 마라, 사실이 아닌 전시가 있다고. 그런 목소리도 있습니다. 너무 아깝죠.]
그럼에도 이어지는 역사
[이앙기/자이니치 3세 : 재일교포라는 우리 존재가 역사 그 자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꾸준히 한국을 알리고
[정희두/고려미술관 이사장 :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하나 세우면 일본 사람들이 도자기를 만든 (한국) 사람도 좀 존경할 수 있을까.]
희망을 찾아왔다
[앵커]
재일동포, 이른바 자이니치 코리안은 일본 곳곳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100년 넘게 각자의 방식으로 수많은 차별과 혐오를 헤쳐왔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터전을 만들었습니다.
이예원 기자가 그들의 삶을 들었습니다.
[이예원 기자]
[{자이니치 코리안(재일동포)에 대해 알고 있거나 들어보신 적 있나요?} 특별히 없습니다. 모릅니다.]
겉모습만으론 누군가의 국적을 판단할 수 없죠.
재일동포는 어디에서나 각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속에 차별은 언제나 존재했습니다.
자이니치 가족의 삶을 소설로 녹여내는 작가 후카자와씨 역시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후카자와 우시오/소설가·자이니치 2세 : 아버지가 고향 삼천포에서 밀항하는 모습이에요. '여기까진 들키지 않고 도망쳐 왔으니 다행이지만, 언제 또 경찰이나 우익들이 잡으러 올지 몰랐다']
차별은 대를 이어 이뤄졌습니다.
[후카자와 우시오/소설가·자이니치 2세 : 결혼을 약속한 연인에게 한국인이라고 밝혔더니 곤란하다, 헤어지자고. '걔는 한국인이라 그래'라는 뒷담화도 있고요.]
하지만 꺾이지 않았습니다.
칼럼을 기고해온 잡지에 혐한 특집 기사가 실린 것을 보고, 연재를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특집 제목은 '한국 따윈 필요 없다' 였습니다.
[후카자와 우시오/소설가·자이니치 2세 :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만뒀어요. 저조차 얘기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을 거라.]
자이니치 1세들의 활동을 돕는 봉사를 하는 김정희 씨.
한때 일본식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김정희/자이니치 3세 : 고3 때 (일본 이름 대신) 본명 '김정희'로 불리고 싶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곧 졸업이니 그 후에 원하는 대로 살라고… 학교에 있는 동안은 다른 학생들에게 동요를 줄 수 있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
하지만 조금씩 세상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앙기/대학생·자이니치 3세 : 대학에서 처음에 한국 이름으로 자기소개를 할 때 '굉장하다', '그러면 한국말을 할 수 있는 건가' 이런 반응이 있었어요.]
차별에 맞서고, 견디고, 스며든 수많은 자이니치 덕입니다.
[이앙기/대학생·자이니치 3세 : 윗 세대 덕분에 지금의 세대는 예전보다 취직도 (쉽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앵커]
일본 사회에서 소외됐던 자이니치들은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냈고, 또 이 문화를 일본 사회에 전파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화로에 구워 먹는 고기구이, '야키니쿠'도 바로 이들 자이니치의 손끝에서 시작됐습니다.
이어서 조해언 기자입니다.
[조해언 기자]
일본 속 작은 한국 오사카 이쿠노구.
이 곳의 코리아타운 시장엔 평일 낮에도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정착하며 만들어졌습니다.
[홍성익/오사카 코리아타운 이사장·자이니치 3세 : 제주도하고 여기 오사카 간에, 옛날에 정기 연락선이 있었거든요. 일하러 오거나 아니면 뭐 그냥 징용으로 온 사람도 있고. 뭐 이런 사람들이 여기 정착하면서…]
해방 후 4·3의 비극을 겪은 제주 사람들에게 '기회의 땅'이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시장 곳곳에 제주에 뿌리를 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강근평/자이니치 2세 : {한국분이세요?} 네. {저희 한국 방송국에서 왔는데요.} 아, 그렇습니까. {고향이 어디세요?} 제주도.]
[홍지령/자이니치 4세 :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 고향은 제주도입니다.]
[이익성/자이니치 2세 : 제주도 조천면. 그 때 제주도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부모님이) 넘어오셨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제주도를 한 번 가보려고 했는데 못 갔습니다.]
빨간 등이 밤거리를 비추는 이곳은 오사카 난바의 중심지입니다.
저녁 식사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식당 곳곳이 붐비는데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거리가 되기까지 그 중심엔 재일동포들이 있었습니다.
이곳 역시 자이니치의 아픈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손용이/자이니치 3세 : 옛날에는 소 내장 다 버렸다. 내장을 버린 것이 일본 말로 호르몬. (버린 것을) 칼질 해가지고, 깨끗이 씻고 우리나라 양념 맵게해서 한 것이 야키니쿠 첫 스타트. (야키니쿠) 첫걸음은 우리 교포가 한 거다.]
안해본 일이 없습니다.
[손용이/자이니치 3세 : (예전엔) 마작, 중국게임, 그것을 이 가게 하기 전에 24년 정도 했어. 사실은 그 회사 같은 데는 못 들어갔다.]
차별 속에 살아왔지만,
[손용이/자이니치 3세 : 학교는 조선학교인데 그때는 우리 (축구팀이) 너무 강했어 옛날에. 일본 축구대회가 있는데 그런 데는 못 나갔어. 큰 대회 같으면 나가면 우승하니까.]
젊은 자이니치들에겐 용기를 내 더 멀리 날아보라고 합니다.
[손용이/자이니치 3세 : 하는 거 다해라. 자기 인생이고 인생 딱 한 번뿐이다.]
(화면제공 :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김성웅 감독)
(공동취재 : 김현예|도쿄 특파원 / 영상취재 : 박상용·신성훈 / 영상디자인 : 조승우·강아람·신하림 / 영상그래픽 : 이송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