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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난립 현수막 피해 걷는 시민들…이게 합법?

입력 2023-05-21 09:10 수정 2023-05-2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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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 횡단보도 근처. 10개 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사진=이지현 기자〉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 횡단보도 근처. 10개 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사진=이지현 기자〉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

전봇대와 교통신호기 등에 10개 넘는 현수막이 어지럽게 붙어있습니다.

정당 현수막과 단체·개인 현수막이 위아래로 뒤덮여 사람들의 시야를 가렸습니다. 우회전하는 차량의 시야 역시 가려졌습니다.
 
19일 서울 광화문 앞 횡단보도 근처에 걸린 정당 현수막. 높이가 2m가 안 되는 탓에 길을 건너는 시민들이 현수막 끈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걸어야 했다. 〈사진=이지현 기자〉

19일 서울 광화문 앞 횡단보도 근처에 걸린 정당 현수막. 높이가 2m가 안 되는 탓에 길을 건너는 시민들이 현수막 끈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걸어야 했다. 〈사진=이지현 기자〉


#서울 광화문 앞.

횡단보도 교통 신호기 두 개 사이에 정당 현수막이 걸려있습니다.

그런데 현수막이 낮게 설치된 탓에 길을 건너는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현수막을 피해 지나가야 했습니다.

자전거를 탄 시민도 몸을 한껏 웅크린 채 현수막 아래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어두운 밤, 얇은 현수막 끈을 미처 보지 못했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19일 서울 서대문구 한 초등학교 앞 스쿨존에 걸린 정당 현수막.〈사진=이지현 기자〉

19일 서울 서대문구 한 초등학교 앞 스쿨존에 걸린 정당 현수막.〈사진=이지현 기자〉


#서울 서대문구 한 초등학교 앞.

어린이 보호구역에 정부 홍보 현수막이 설치됐습니다. 바로 10m 옆에 '어린이보호구역 내 현수막 설치 금지'라는 구청의 안내문이 붙어 있는데도 말이죠.

위 사진의 현수막들은 모두 행정안전부의 '정당현수막 설치·관리 가이드라인'을 위반했습니다.

행안부 가이드라인은 ▲어린이·노인·장애인 보호구역에 설치 금지 ▲보행자 통행 장소 및 교차로 주변에 높이 2m 이하로 설치 금지 ▲가로등에 2개를 초과해 설치 금지 ▲교통 신호등이나 안전표지를 가리는 현수막 금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내걸린 정당 현수막 때문에 안전사고가 일어나자 정부가 지난 8일부터 가이드라인을 시행한 겁니다.
 

“정당 활동 보장”…정당 현수막이 규제 안 받는 이유


정당 현수막이 처음부터 이렇게 마구잡이로 내걸렸던 건 아닙니다. 원래는 일반 현수막과 똑같이 옥외광고물법에 따라 규제를 받았습니다.

현수막을 걸려면 지방자치단체에 신고한 뒤, 정해진 게시 시설에만 설치할 수 있었습니다. 또 가로수나 전신주, 신호기, 도로 분리대에는 설치가 금지됐었죠.

그런데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소속 김민철·서영교·김남국 의원이 각각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정당 현수막은 사전에 신고하거나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고, 장소나 수량 제한을 받지 않도록 하는 법안이었습니다. 자유로운 정당 활동을 보장하고, 정당의 정책 추진 현황을 국민에게 빨리 알린다는 취지였죠.

당시 정부는 일반 현수막과의 형평성, 주민 불편 등을 이유로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여야는 한마음으로 법안에 찬성했고, 지난해 5월 본회의에서 재석 227명 중 찬성 205표, 반대 9표, 기권 13표를 받으면서 통과됐습니다. 바뀐 법은 지난해 12월부터 시행됐습니다.

앞선 사진들의 현수막이 모두 불법은 아닌 것입니다.
 
19일 서울 종로구 한 횡단보도 옆에 정당 현수막 3개가 걸려있는 모습.〈사진=이지현 기자〉

19일 서울 종로구 한 횡단보도 옆에 정당 현수막 3개가 걸려있는 모습.〈사진=이지현 기자〉

현수막에 목 걸려…민원도 2배 이상 늘어


문제는 실제 현장에선 부작용이 컸다는 겁니다.

인천 연수구에서는 밤에 전동킥보드를 타던 대학생이 정당 현수막 끈에 걸려 목에 찰과상을 입었습니다. 대구에서도 자전거를 타고 가던 주민이 횡단보도를 건너려다가 현수막 끈에 목이 걸려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죠.

경북 포항에서는 가로등 사이에 현수막 4개를 동시에 걸었다가, 가로등이 넘어지면서 지나가던 사람이 다치기도 했습니다.

행안부에 따르면 법이 바뀐 뒤 이런 안전사고가 8건 발생했습니다.

시민들의 민원도 많아졌습니다. 한창섭 행안부 차관은 “현수막 관련 민원은 개정 옥외광고물법 시행 이전에 3개월 동안 6400여 건이었지만, 시행 이후 3개월 동안 1만 4000여 건으로 늘었다”고 말했습니다.
 

“강제성 없는 가이드라인은 한계”


안전사고와 시민 불편이 잇따르자 결국 행안부가 가이드라인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한계가 있는 듯 합니다. 말 그대로 '가이드라인'이다 보니 강제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안부 관계자는 “가이드라인을 위반한 현수막이 있더라도, 지자체가 각 정당에 시정 요구를 먼저 한다”며 “시정 요구 후에도 바뀌지 않았을 때 철거를 하다 보니 아직 가이드라인을 위반한 현수막들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또 “아무래도 가이드라인이 강제성이 없고, 정당에 협조를 요청해야 하는 부분이다 보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최대한 법 개정을 빠르게 하는 쪽으로 업무를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무분별하게 내걸리는 정당 현수막을 떼려면 결국 법이 다시 개정돼야 하는 겁니다.

한때 정당 현수막 규제를 없앴던 국회는, 다시 규제를 강화하는 법을 내놓고 있습니다.

정당 현수막 설치 장소와 개수, 규격 등을 제한하자는 내용의 법안이 지난 3월부터 발의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발의된 법안은 총 6건.
 
그렇지만 법안은 아직 제대로 논의도 시작하지 못한 채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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