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AFP 캡처] 중국의
반도체 자립 프로젝트가 나날이 암초를 만나고 있습니다.
[중국은, 왜] 칼럼에서 자주 거론했듯이 반도체 제조를 위한 소재ㆍ부품ㆍ장비와 인력, 공장까지 전방위에서 중국의 목줄을 죄고 있습니다.
중국도 천문학적 자금을 대면서 인력을 빼 오고, 기술을 빼돌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중국의 편이 아닌 모양입니다. 고액 연봉으로 유혹한 인력들로부터 기술을 빨아들여 제조공정에 들어가고 수율(완제품 중 정상품 비율) 높은 제품을 생산해 결승 테이프를 끊으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ASML 클린룸 내부 전경. [사진=ASML 홈페이지] 디스플레이도 고속통신도 AI도, 자금을 쏟아붓고 인력을 빼내고 기술을 빨아들이는 이 공식으로 세계 시장에서 우리 제품을 위협하거나 시장을 뺏어 갔습니다.
가뜩이나 반도체 하나 만들기까지 수 많은 공력과 천문학적 자금이 드는데 시간마저 외면한다면 정말 시진핑 체제는 따로 '차이니즈 스탠더드 반도체 생태계'를 짜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초침 소리가 포성 소리처럼 크게 들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가슴 철렁한 일이 또 일어난 모양입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9일 보도입니다. 일본이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에 동참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중국에서 일본산 반도체 중고 장비에 대한 문의가 급증했다는군요.
[사진= 힌두스탄타임스 캡처] 중국은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의 극자외선(EUV) 장비를 도입하려다 하도 규제가 세게 들어와 포기한 상태입니다.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웨이퍼(판)에 빛으로 미세한 전자 회로를 그려 넣는 노광 작업이 필요합니다. EUV 장비는 극자외선으로 노광 작업을 하기 때문에 10나노미터(㎚ㆍ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 이하 초미세 공정이 가능합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게 지금 중국의 형편을 요약합니다. EUV만 못해도 DUV 장비(※ 자동차ㆍ스마트폰ㆍPC 등에 들어가는 범용 반도체 제조 장비)로
수율 따질 것 없이 물량전을 펼치면 언젠가 초미세 공정에도 도달하지 않겠느냐는 건데요.
삽으로 흙을 뜨는 일을 대를 이어 하다 보면 언젠가는 산을 옮길 수 있다(愚公移山ㆍ우공이산)는 믿음입니다.
미국의 규제는 이런 중국의 '우공이산 전략'에도 메스를 대고 있습니다. 아예 DUV 수출도 막아버리겠다는 겁니다. 미국ㆍ일본ㆍ네덜란드 등 첨단 핵심 장비 제조국가들이 스크럼을 짜면 이것도 가능합니다. 중국은 최첨단 반도체는 물론 범용 반도체와 메모리반도체 생산까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야 합니다.
중국은 국내 반도체 생태계의 사이즈를 키워 그 안에서 치고받다 보면 어떻게 생존의 길이 보이지 않겠느냐...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남은 것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
시간은 가는데 치아는 몽땅 뺏겼고 잇몸도 못 쓸 상황입니다.
중국은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바로 고급 인력과 돈과 혁신 동력을 될 때까지 주입하면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삼성페이나 곧 도입되는 애플페이로 결제하는 게 대중화되다 보니 모바일 결제가 화폐처럼 전부터 늘 있었던 서비스처럼 보이지만 2014년 중국에서 폭발적으로 상용화된 10년도 안 된 기술입니다.
중국의 채팅앱 위챗이 출시한 이 서비스를 통해 채팅 창에서 송금하기 시작했었죠. 위챕과 연결된 은행 계좌를 통해 채팅하다 송금하고 송금하려고 채팅하고...
모바일 결제는 대륙을 종횡으로 달리며 퍼졌습니다. 급기야 길거리 야채 노점상도, 1위안짜리 죽을 먹을 때도, 사진에서 많이 보셨듯 거지도 위챕 결제를 했습니다. 큐알 코드를 스캔해서 말이죠.
[사진= 익스프레스 익스플레인드 캡처] 중국인들이 얼마나 현금을 신봉하느냐면, 부패 사정관들이 유력 정치인의 별장을 덮치면 수십 개의 방마다 현금 더미가 쌓여 있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손 때 묻은 현금을 띠로 묶어 쌓아두면 거기서 세균이 증식해 방문을 여는 순간 악취에 취해 정신이 몽롱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요. 도대체 얼마나 쌓아둔 건지 가늠이 안 됩니다.
아무튼 안전하고 이동 편의성이 높은 최고가 귀금속을 선호할 만도 한데,, 중국인의 현금 사랑, 이건 신앙의 반열인 거 같습니다.
그런 중국인들이 위챗페이, 알리페이를 쓰면서 지갑을 놓고 다닙니다.
신용카드 들고 다니면 된다고요? 개인 신용 평가가 까다로워 신용카드 발급율은 한 자릿수도 안되는 나라가 이 단계를 건너뛰고 모바일 결제로 성큼 지나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중국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변화에 어떤 함의가 있는지, 인터넷 비즈니스 생태계에 어떤 지각변동을 몰고 올 것인지 우리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큐알 기술을 먼저 개발하고도 아직도
지갑에 동전을 갖고 다니는 일본인의 완고한 의식구조 안에선 먼 산 보는 일이었을 겁니다. 모바일 페이 서비스를 앞세워 우버를 베꼈고 중국 전역을 디디추싱이 질주했습니다. 급기야 알리바바의 뉴욕 증시 입성으로 정점에 올랐습니다.
2014년 9월이었습니다. 알리바바가 뉴욕 증시에 상장했습니다. 기업 공개로 끌어모은 자금이 250억 달러였죠. 사상 최대 규모였습니다.
구글ㆍ페이스북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게 가능해? ”
“그런데 그게 일어났어.”
세계가 경악했죠. 여러분도 감지하셨겠지만 이때부터 알리바바 그룹 창업자 마윈이 대중매체에 노출되는 빈도가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보다 많았습니다.
2018년 언젠가 중국 뉴스 서비스 앱을 보다 보니 마윈의 노출도가 시진핑을 압도한다는 느낌까지 받곤 했었죠. 그땐 알리바바의 파이낸셜 서비스가 파죽지세로 뻗어 나갈 때였으니까요.
[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왠지 이러다 정 맞겠는데…싶었죠. (※이런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습니다. 올 초 알리바바는 거부권을 갖는 황금주를 당국에 허용하면서 지분율이 어떻든 마윈은 이사회의 1/n이 됐습니다.)
아무튼 세계가 경악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인터넷 만리장성을 쌓아 놓고 그 안에서 조몰락조몰락 하던 중국의 인터넷 생태계가 어마어마한 시장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혁신적인 서비스들이 속출하는 자력갱생적 유니버스로 진화했다는 걸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250억 달러가 준 충격입니다.
중국은 정책 결정이 스피디하지 않습니다. 인구도 많고 지역차도 크고...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은 나라입니다. 한번 방향이 정해지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부터
급경사를 구르는 눈덩이라고 보면 됩니다. 리커창 총리가 2014년 9월 인터넷 발전 방향을 담은 구호를 외쳤고 이듬해 정부 정책이 추인되는 전인대에서 인터넷플러스 정책이 출범합니다.
2014년 가을 리커창 총리가 젊은 인터넷 기술 개발자들과 환담하고 있다. [사진= 바이두백과 캡처] 인터넷 발전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던 정부가 방향을 돌려 '지원책으로 불길을 당긴다'는 분명한 사인이었습니다. 중앙정부가 창업을 얘기하니, 지방 정부는 주요 도시에 창업 보육센터를 조성했습니다.
재정 자금이 인터넷 벤처로 방향을 트니 거대한 민간 부문의 사모펀드 등이 유망 벤처를 찾아 나섰습니다.
우리는 그다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터넷 서비스의 만개입니다.
인터넷은 단순한 정보전달의 통로가 아닌 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배달앱이 등장하고 에어텔카를 여행앱으로 한 번에 결제합니다. 대출을 받고 대출을 알선하고...수많은 스타트업이 탄생했습니다.
승자가 점유율을 싹쓸이 하는 무자비한 치킨 게임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스타트업이 명멸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게 바로 데이터였습니다. 음식을 시킬 때, 봄옷을 주문할 때, 고속철을 예약할 때도 데이터는 쌓여갔습니다. 차곡차곡 쌓인 데이터가 향하는 곳은 어디였을까요.
AI였습니다. 소프트웨어 전쟁에서 고성능 AI가 각축을 벌였고 고속 컴퓨팅 서비스를 결합한 클라우딩 서비스가 앞다퉈 시장에 등장했습니다. 미국의 아마존ㆍ구글ㆍMS가 하는 서비스와 외형상 어깨를 겨눌 만 했습니다.
[사진=AP, 연합뉴스] 중국의 상업 인터넷 서비스 혁신은 여기까지입니다. 제조가 아닌 서비스 분야였기에 가능했습니다. 이제는 자력갱생의 시간입니다.
반도체는 이른바 '장비빨'이 사업의 성패를 규정하는 산업입니다. 우리 반도체 산업뿐 아니라 메이커들은 최첨단 공정을 관통하는 장비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장비 확보 경쟁이 글로벌 반도체 패권 각축의 향배를 결정합니다.
물론 지금의 중국은 1960년대 대약진 암흑기 때의 중국이 아닙니다. '2025 반도체 굴기' 프로젝트는 집집마다 고로를 만들어 철 생산량에서 영국과 독일을 추월한 뒤 궁극적으로 미국을 따라잡겠다던
정신승리 레벨이 아닙니다. 국부가 늘어났고 역량도 축적했습니다. 폐쇄적인 시장도 있고 방대한 구매력도 있습니다.
우리 산업계는 재편되는 반도체 공급망에서 고지를 사수하는 한편 중국의 자력갱생 반도체 프로젝트에서 어떤 변곡점이 나올지 촉각을 더 세워야 할 때가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