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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와는 다른 한국형 'K-존엄사법'…어디까지 가능할까?

입력 2023-02-01 16:59

'허용법'도 '처벌법'도 없는 스위스 조력사망
비영리단체들이 외국인 승인 여부 결정
국내 발의 '조력존엄사법'에선
정부 산하 심의위원회가 승인
자료 제출 명령권 등으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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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용법'도 '처벌법'도 없는 스위스 조력사망
비영리단체들이 외국인 승인 여부 결정
국내 발의 '조력존엄사법'에선
정부 산하 심의위원회가 승인
자료 제출 명령권 등으로 감독

 취재진이 지난해 12월 스위스 조력사망 현장 취재 당시 촬영한 약물. 'Dosis letalis(치사량)'라고 적혀있다. 약물 옆엔 현장 목격자들이 남겨야 하는 인적사항 문서가 놓였다. 60대 프랑스 뇌종양 말기 환자 파트리크는 의사 처방을 받은 이 약물로 취재진 앞에서 눈을 감았다. 취재진이 지난해 12월 스위스 조력사망 현장 취재 당시 촬영한 약물. 'Dosis letalis(치사량)'라고 적혀있다. 약물 옆엔 현장 목격자들이 남겨야 하는 인적사항 문서가 놓였다. 60대 프랑스 뇌종양 말기 환자 파트리크는 의사 처방을 받은 이 약물로 취재진 앞에서 눈을 감았다.
스위스와는 다른 한국형 'K-존엄사법'…어디까지 가능할까?
■ 스위스 조력사망엔 '허용법'도 '처벌법'도 없다


지난 2018년 5월 호주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는 스위스에 찾아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104세였던 그는 불치병에 걸린 말기 환자가 아니었습니다. 숨지기 2년 전까지도 연구를 했지만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져 혼자 힘으로 생활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그는 자신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에게 "독립적으로 결정하는 것들이 자꾸 사라진다"며 "노인들이 조력사망하는 것을 포함해 완전한 형태의 시민권을 누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구달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했던 루에디 하베거(조력사망 단체 페가소스 현 대표)는 JTBC에 "그는 호주에서 3번이나 자살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04살 나이에 스위스까지 32시간을 여행해서 와야 했다"고 했습니다. 호주에선 일부 주에서만 조력사망이 합법인데, 불치병에 6개월 미만 시한부 선고가 내려져야 가능하다는 제한 조건이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호주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 〈사진출처=연합뉴스〉호주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 〈사진출처=연합뉴스〉
스위스에선 조력사망을 허용하는 법도, 처벌하는 법도 없습니다. 대상과 절차가 구체적으로 명시된 법의 틀 안에서 조력사망이 이뤄지는 캐나다, 네덜란드, 미국 등과 다릅니다. 스위스가 외국인들의 '자살 관광지'라는 오명을 얻게 된 배경 중 하나입니다.


다만 스위스 형법 115조에 따라 '이기적인 동기'로 다른 사람의 자살 시도·실행을 선동하거나 도와주는 경우 5년 이하 징역이나 금고형에 처한다고 돼있을 뿐입니다. 여러 차례 법원 판례를 통해 '약물은 의사의 처방을 받을 것', 그리고 '온전한 판단능력이 입증될 것'과 같은 조건들이 생겨났습니다. 또 스위스 의학 협회(FMH)가 채택하는 윤리 지침에서 실무적인 조건들을 권고하고 있지만, 구속력 있게 대상과 조건을 규정하는 법령은 없습니다. 2011년 취리히 주에서 최소 1년간 거주한 사람에 한해서 조력사망이 가능하도록 하는 법률안이 주민투표에 부쳐졌지만, 80%가 반대하면서 부결됐습니다.

가끔 스위스 검찰이 문제삼곤 합니다. 조력사망자의 의료 기록에서 정신병 진단 기록 등을 발견해, "판단력이 없는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며 단체 관계자를 기소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단체의 '영리적 동기'에 의한 죽음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무죄가 나는 추세입니다. 최근 살인죄로 재판에 넘겨져 1·2심 무죄를 선고받은 에리카 프레지크(라이크서클 대표)는 JTBC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정신병력은 신체적 고통 끝에 얻은 우울증이었다"며 "사망자가 숨지기 전 찍어둔 영상이 스스로가 온전한 정신상태였음을 입증해주는 증거로 인정됐다"고 밝혔습니다.

■ 스위스 단체들이 승인·시행…'브레이크 없이' 확장되는 논의


스위스와는 다른 한국형 'K-존엄사법'…어디까지 가능할까?
스위스 단체 디그니타스 조력사망 시행 통계(건) 1998-2021. 윗줄이 연간, 아랫줄이 누적 건수다.스위스 단체 디그니타스 조력사망 시행 통계(건) 1998-2021. 윗줄이 연간, 아랫줄이 누적 건수다.
스위스로 매년 수백명씩 몰려드는 외국인들의 조력사망 적격 여부는, 이를 시행하는 비영리 단체들이 정합니다. 단체는 대부분 법률가와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으로 구성돼있습니다. 외국인 회원을 받는 각 단체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기준과 절차를 적용합니다.


김경태씨가 디그니타스에 '그린라이트(승인)'을 위해 제출한 서류 중 일부김경태씨가 디그니타스에 '그린라이트(승인)'을 위해 제출한 서류 중 일부
디그니타스나 라이프서클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유발하는 질병을 가지고 있는지를 꼼꼼히 들여다보는 편입니다. 조력사망을 원하는 회원들에게, 고통을 서술하는 장문의 글부터 병력이 담긴 의료 진단서, 경제적 사정 등을 입증하는 복잡한 서류들을 요구합니다. 디그니타스 회원 김경태씨(복합부위통증증후군 환자)는 "힘들었던 것에 대한 모든 내용을 적어서 30페이지를 냈다"며 "서류를 내고 피드백을 받으며 계속 주고받은 결과 언제든 원할 때 일정을 잡을 수 있는 상태(그린라이트)가 됐다"고 했습니다.

페가소스나 엑시트 인터내셔널은 비교적 느슨합니다. '온전한 정신 상태'로 스스로 결정했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꼭 불치병이나 말기 환자일 필요는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루에디 하베거(페가소스 대표)는 "죽을 때까지 고통받으라고 말할 권리는 국가에 없다"며 "의사들의 의견이나 지침보다 내가 심각하게 고려하는 건 인권"이라고 주장합니다.

  엑시트 인터내셔널이 개발한 셀프 조력사망캡슐 사르코. 버튼을 누르면 질소가 나와 흡입하는 방식. 이들은 의사 개입 없이 '쉬운 조력사망'을 추구한다. 엑시트 인터내셔널이 개발한 셀프 조력사망캡슐 사르코. 버튼을 누르면 질소가 나와 흡입하는 방식. 이들은 의사 개입 없이 '쉬운 조력사망'을 추구한다.
필립 니츠케(엑시트 인터내셔널 설립자)는 JTBC와의 인터뷰에서 "조력사망은 아주 아픈 사람들을 위한 특권 같은 것이 아닌, 인간의 근원적 권리에 관한 훨씬 더 큰 주제"라며 "자살이 좋은 것이란 게 아니라 국가가 그걸 방해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란 논리를 펴기도 했습니다.

이들도 정신 질환을 가진 회원들은 더 조심스럽습니다. 단체와 연계된 정신과 의사들과 수차례 심층 상담을 하도록 합니다. 스위스 연방 대법원은 2006년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들도 삶을 마칠 때와 방식에 대해 결정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지만 당사자의 분별력 여부는 스위스 의사들이 조력사망 약물을 처방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이렇게 단체와 연계된 의사들의 판단으로 약이 처방됩니다. 이후 조력사망이 이뤄지면 법의학자와 경찰이 현장 방문으로 범죄 혐의 여부를 검토합니다.

스위스 정부에는 이들 단체로부터 주기적으로 관련 서류들을 제출받거나 관리할 권한도 없습니다. 그렇다보니 주스위스 한국 영사관에서도 "스위스내 조력사망 한국인에 대해 어떤 정보도 갖고 있는 게 없다"는 입장입니다.

국내 조력사망 입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죽는 사람들을 '공적 관리의 영역'으로 데려와 보호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스위스와는 다른 한국형 'K-존엄사법'…어디까지 가능할까?
■ 한국 발의 법안에선 '정부 위원회'가 심의…철저한 개입·감시

지난해 6월 우리나라 국회에서 발의된 조력존엄사법엔 정부가 철저히 통제하는 방식의 구상이 담겼습니다.

보건복지부 산하에 조력존엄사심사위원회(위원장 보건복지부 장관)를 꾸려 희망자의 적격 여부를 정하게 했습니다. 15명 이내의 의료인, 윤리·심리분야 전문가 등으로 구성합니다. 조력 대상자는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경우이거나 말기환자인 경우, 스스로의 의사에 따른 결정이란 점이 인정받을 경우로 정했습니다.

스위스와는 다른 한국형 'K-존엄사법'…어디까지 가능할까?
그때 조력존엄사를 희망한다는 뜻을 담당 의사 및 전문의 2명에게 밝히게 했습니다. 가족 등 타인에 의해서 자발적 의사인 것처럼 왜곡될 가능성을 막아보겠단 취지입니다. 나아가 조력존엄사 대상자로 결정되더라도, 1달을 더 기다리며 숙고하도록 정했습니다.


보건복지부장관은 조력존엄사 기관에 업무 관련 명령을 하거나 서류 제출을 요구할 수도 있게 했습니다.

보완할 점이 많다고 평가받는 법안입니다. 위원회 구성과 조력존엄사 시행 대상자가 훨씬 더 구체적으로 규정돼야 논란을 줄일 수 있단 지적이 나옵니다.

지난해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2022 세계 죽을권리협회 컨퍼런스에 참석해 발표 중인 최다혜 한국 존엄사협회 대표. 지난해 초 우리나라에 처음 협회가 생겼고 국제 회의에 참석했다.지난해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2022 세계 죽을권리협회 컨퍼런스에 참석해 발표 중인 최다혜 한국 존엄사협회 대표. 지난해 초 우리나라에 처음 협회가 생겼고 국제 회의에 참석했다.
최다혜 한국존엄사협회 대표는 "시행 대상으로서 '말기환자'를 구체적으로 정해놓은 뒤 사회적 논의를 진행하며 점차 넓혀나가야 혼란을 줄일 수 있다"고 짚었습니다. 김현 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은 "조력존엄사를 도운 담당 의사 뿐 아니라, (의사의 조력 과정을) 방조하거나 동행해준 가족·지인도 자살방조죄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항도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연령 기준을 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미국 오레건 주(18세 이상), 네덜란드(12세 이상), 오스트리아(18세 이상) 등 대부분 조력사망이 제도화된 나라들에선 나이 제한을 둡니다.

■ 국회, 조력존엄사법 발의 뒤 1차례 논의…복지부 "반대"

스위스와는 다른 한국형 'K-존엄사법'…어디까지 가능할까?
무엇보다 현행 연명치료중단 제도의 대상이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으로 제한된 점, 호스피스 완화치료 등 생애 말 돌봄 지원이 부족한 점을 들어 "우선순위를 따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이 법안을 대표발의한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현재 정부 반대로 계류 중이라 부단히 정부를 설득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은 지난해 12월 국회 보건복지위 법안심사소위에 출석해 "(현행법상) 연명치료 결정에 대해 임종기만 허용하고 있는데 말기·식물 상태·치매 등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간 뒤 이 법안에서 얘기하는 조력사를 검토하는 것이 갈등을 최소화하는 방향일 것"이란 의견을 밝혔습니다.

앞서 우리나라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게 한 제도도, 법원으로부터 첫 연명치료 중단 확정판결을 받아낸 김모 할머니 사건 이후 9년이 걸렸습니다.

국회가 지난해 6월 법안 발의 이후 조력존엄사 법안을 논의 테이블에 올린 것은 한 차례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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