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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면]애걔 350만의 나라? 그런데 우루과이는 왜 축구를 잘하지?

입력 2022-11-22 06:55 수정 2022-12-06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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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만5152명. 2021년 기준 우루과이의 인구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광역시 정도의 인구입니다. 면적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의 1.7배 크기지만 인구만 놓고 보면 작은 나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축구는 어떨까요.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은 14위입니다. 두 번의 올림픽 우승(1924년, 1928년), 그리고 두 번의 월드컵 우승(1930년, 1950년)을 일궜죠. 그 역사는 찬란합니다.
 
우루과이만 넘었다면 우리 축구는 어디까지 나아갔을까요. 2010 월드컵 16강전의 기억이 아직 선연합니다. (사진=연합뉴스)우루과이만 넘었다면 우리 축구는 어디까지 나아갔을까요. 2010 월드컵 16강전의 기억이 아직 선연합니다. (사진=연합뉴스)

우루과이 축구의 미스터리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사람 수가 많지 않은데 어떻게 축구 강국이 됐을까요. 1930년 첫 월드컵 우승을 했을 때 우루과이 인구는 150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1950년 월드컵에서 정상에 섰을 때는 220만 명이었습니다.
축구에서 가장 어리석은 게 사실 인구와 견줘서 축구 실력을 가늠해보는 거죠. 중국은 14억명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면서도 축구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늘 고민입니다. 우루과이는 그 반대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리고 '축구 실력은 인구에 비례하지 않는다'고 떳떳이 말합니다.
 
우루과이는 젊음과 경험이 공존합니다. 왼쪽부터 발베르데, 수아레스, 누녜스. (사진=연합뉴스)우루과이는 젊음과 경험이 공존합니다. 왼쪽부터 발베르데, 수아레스, 누녜스. (사진=연합뉴스)

그렇다면 우루과이는 왜 그토록 축구를 잘할까요. 너무 가난해서 축구를 성공의 사다리로 여기는 것 아닐까 싶어 이 나라의 경제 수준을 살펴봤습니다. 우루과이는 남미에서 상대적으로 경제적 안정을 이룬 나라입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남미 1위를 달릴 정도입니다. 결핍이 축구의 성공을 만들어낸 전적인 이유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 어떻게 하면 축구를 잘할 수 있고 축구선수를 잘 키워낼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축구할 기회를 창출하는 길을 잘 뚫어놓았다고 해야 할까요. 우루과이는 남미의 거대한 두 나라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그 틈에서 지형적 위치를 잘 활용합니다. 특히 우루과이의 독립을 도운 아르헨티나와 가깝습니다.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진=jonathanbroy 캡처)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진=jonathanbroy 캡처)
우루과이 어린이들은 일찌감치 축구를 시작합니다. '베이비 풋볼'은 그들의 축구문화를 상징합니다. 여섯 살부터 열세 살까지 아이들이 뛰는 리그가 활성화돼 있습니다. 6만 5000명이 넘는 아이들이 60개 이상의 리그에서 활약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될성부른 유망주는 가깝게는 아르헨티나 리그, 멀리는 유럽까지 곧바로 소개되는 시스템도 잘 갖춰져 있습니다. 일찍 최고의 무대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이 넓다는 것이죠. 지난 5월 기준으로 우루과이는 자국 선수 340명을 39개 나라 리그로 내보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전 세계에서 11번째로 자국 선수를 다른 나라로 진출시킨 숫자가 많았습니다. (CIES 자료 참조)


또 하나, '차루아의 발톱'(La garra charrua)이란 열쇳말도 우루과이 축구의 역사성을 상징하곤 합니다. 차루아는 우루과이 원주민을 뜻합니다. 16세기 스페인의 침략에 강하게 맞섰던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그 부족의 투혼이 우루과이 축구와 함께한다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우리 축구가 이야기하곤 하는 정신력, 투혼, 끈기란 말과 비슷합니다. 이런 역사가 축구를 통해 하나가 되는 길을 열어줍니다.
 
우루과이는 1930년 월드컵 개최국이자 우승국입니다. 당시 인구는 150만명에 불과했습니다. (사진=AP연합뉴스)우루과이는 1930년 월드컵 개최국이자 우승국입니다. 당시 인구는 150만명에 불과했습니다. (사진=AP연합뉴스)

축구의 다양성을 끌어낸 역사도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루과이 축구는 아프리카 이주 노동자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기도 했습니다. 1916년 제1회 남미축구선수권대회에서 칠레를 4대0으로 이긴 날, 칠레는 경기가 무효라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우루과이 대표팀에 두 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루과이는 당시 세계 유일의 흑인 국가대표를 보유한 나라였습니다. 파리에서 열린 1924년 올림픽에서도 안드라데라는 아프리카 선수의 출현은 유럽을 놀라게 했습니다. (책 〈축구, 그 빛과 그림자〉 중에서)

 
350만 인구의 우루과이는 축구에 진심입니다. 도하에 몰려든 팬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사진=연합뉴스)350만 인구의 우루과이는 축구에 진심입니다. 도하에 몰려든 팬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지금의 우루과이 대표팀도 세대의 다양성이 토대를 이룹니다. 최전방엔 월드컵을 네 번이나 나서는 수아레스(35)와 처음 출전하는 누녜스(23)가 공존합니다. 풍부한 경험과 거침없는 도전의 조화를 꾀하는 거죠. 우루과이는 너무 노쇠해서 그게 약점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그건 너무 단선적인 해석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루과이는 세대교체론을 뛰어넘어, 신예와 노장이 함께하는 축구를 내세웁니다.

 
어린 팬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수아레스. '베이비 풋볼'은 우루과이 축구의 문화를 상징합니다. (사진=AP연합뉴스) 어린 팬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수아레스. '베이비 풋볼'은 우루과이 축구의 문화를 상징합니다. (사진=AP연합뉴스)
우리나라는 24일 우루과이와 만납니다. 어쩌면 우루과이의 축구 역사와 만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축구 문화를 살피는 게 우루과이를 더 잘 알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죠. 지금의 우루과이는 카바니와 수아레스. 그리고 누녜스, 발베르데와 벤탄쿠르까지 선수 면면이 화려합니다. 그렇다고 위축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루과이가 그렇듯, 우리나라 역시 우리만의 축구를 얼마나 잘 풀어내느냐가 중요합니다.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 온 우리 축구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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