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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썰]제비뽑기가 가른 열두살 인생...김옥순 할머니 기억하기

입력 2022-10-19 14:43 수정 2022-10-19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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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JTBC 뉴스룸 캡쳐〉〈사진=JTBC 뉴스룸 캡쳐〉

지난 16일 사망한 일제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옥순 할머니의 장례 절차가 오늘(19일) 마무리됩니다. 김 할머니가 살던 서울 돈의동 쪽방촌 분향소는 오늘까지 운영됩니다. 김 할머니의 유해는 군산에 있는 추모관으로 갑니다.

할머니는 결국 대법원의 손해배상 소송 판결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습니다. 할머니를 오래 알고 지내며 소송을 함께해 온 민족문제연구소 김진영 선임연구원은 “우리 사회는 식민지를 어떻게 기억할지, 고통을 호소하는 분들을 어떻게 대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갈지에 대한 철학이 부족하다”라며 “법원의 판결은 그런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단순히 돈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본 기사는 김옥순 할머니와의 2018년 심층 인터뷰 내용, 분향소를 만든 돈의동 쪽방촌 주민들, 민족문제연구소 김진영 선임연구원, 손은식 프레이포유 목사의 인터뷰 등 주변 취재를 토대로 내러티브 형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

▶관련기사 : 12살부터 강제동원…사과 못 받고 떠난 김옥순 할머니
https://news.jtbc.co.kr/html/380/NB12085380.html

 
〈사진=JTBC 뉴스룸 캡쳐〉〈사진=JTBC 뉴스룸 캡쳐〉

내 이름은 김옥순. 1929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똘똘한 편이었다. 공부도 잘 했다. 그런데 시절이 안 좋았다. 국민학교도 졸업을 못 했다. 내가 열두 살에 일본에 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국민학교 6학년 때 학교에서 난데없이 구지비끼(제비뽑기)를 했다. 일본에 일하러 갈 50명을 뽑아야 한다고. 내가 될 줄 몰랐다. 소식을 들은 부모들이 학교를 찾아와 못 간다고 소리치고 울었다. 그래도 안 갈 방법이 없었다. 일본에 가던 날 기차역도 울음바다였다. 나는 그 길로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 내가 일할 곳이 후지코시라는 군수공장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거기서 종일 항공기 부품과 탄피를 만들었다. 일이 끝나면 공장 옆에 있는 숙소에서 잤다. 밥 주는 거 얻어 먹고 여럿이서 한 방에서 잤다. 작업은 위험했다. 죽은 사람도 눈 앞에서 봤다. 몸빼를 입고 일을 하던 친구가 기계에 빨려 들어가 죽었다. 나랑 같이 군산에서 온 친구였다. 같이 일하던 소녀들이 울고 불고 난리가 났는데 그뿐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여기 끌려온 조선인이 1,000명이 넘었단다. 대부분이 나 같은 소녀들이었다. 후지코시는 조선인 소녀들을 가장 많이 데려간 군수 기업이다.

다행히 머지않아 해방이 됐다. 그런데 돌아갈 돈이 없었다. 월급을 10원도 못 받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식모살이를 하다가 배 타고 귀국했다. 고향에 돌아가 나 좋다던 사람을 만나 아이도 셋 낳았다. 그 때 잠깐 행복했던 것 같다. 오래 가지는 못했다. 혼자 서울에 올라와 돈의동 쪽방촌에 자리를 잡았다. 호적엔 여동생 뿐이다.

 
〈사진=JTBC 뉴스룸 캡쳐〉〈사진=JTBC 뉴스룸 캡쳐〉

그래도 아주 외롭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원래 친구들 만나서 놀고 전화하고 그런 걸 좋아한다. 쪽방촌 사람들은 나를 '옥순할매'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정이 많아 골목이 너무 시끄러울 때도 있었다. 나는 성격이 좀 불 같다. “왜 떠드냐”고 호통을 치면 사람들이 막 웃었다. 농담도 자주 했다. 치매 때문에 걱정이 됐나. 사람들은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하고 물어봐 줬다. 그럴 때마다 “100살 넘었지”하고 대답하면 또 웃었다. 맛있는 건 자주 나눠 먹었다.

 
쪽방촌 이웃들과의 제주도 여행에서 환히 웃고 있는 김옥순 할머니. 〈사진=손은식 프레이포유 목사〉쪽방촌 이웃들과의 제주도 여행에서 환히 웃고 있는 김옥순 할머니. 〈사진=손은식 프레이포유 목사〉

나 도와주는 목사님도 집에 자주 와주셨다. 목사님은 가끔 병아리 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애들이 학교 안 가는 날 우리 집에 데려와 놀았다. 그게 너무 좋았다. 나는 애들이 잘 있는지 자주 물었다. 막내아들은 아주 어렸다. 돌 된 아기가 폭 안기니 작은 쪽방이 온통 환해졌다.
 
손은식 목사의 막내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김옥순 할머니. 〈사진=손은식 프레이포유 목사〉손은식 목사의 막내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김옥순 할머니. 〈사진=손은식 프레이포유 목사〉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건강이 나빠졌다. 자꾸 기억을 잃었다. 문지방을 넘다가 얼굴을 크게 다치기도 했다. 새벽에 엄마를 찾겠다며 밖에 나가 남의 집 문을 두드린 적도 많았단다. 옆집 사는 정혜 씨가 그 때마다 나와서 챙겨줬다. 집에 들여보내 주고 이불도 덮어줬다. 그 와중에도 일본 갔던 기억은 안 까먹었다. 공장 가서 일하고 왔다고 보는 사람마다 말하고 다녔다. 들어주고 함께 아파해줘서 고맙다.

 
쪽방촌 주민이 찍은 김옥순 할머니의 최근 사진. 〈제공=나정혜〉쪽방촌 주민이 찍은 김옥순 할머니의 최근 사진. 〈제공=나정혜〉

전 세계를 휩쓴 바이러스를 나도 피하지 못했다. 앓고 있는데 복지사가 와서 병원에 데려갔다. 짐 정리도 못 하고 쪽방을 떠났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93세라서 치명적이었다고들 그랬다. 이웃들이 쪽방촌 사랑방에 분향소를 차렸다. 몇 년 전에 구청 도움으로 웨딩드레스 입고 찍은 사진을 가져다 영정사진으로 해 놨더라. 모습은 예쁜데 표정이 굳어 있다. 조금 더 웃고 찍을 걸 그랬다. 그런걸 평생 입어본 적 없어서 그랬다.

 
서울 돈의동 쪽방촌 사랑방에 마련된 분향소. 〈사진=민족문제연구소〉서울 돈의동 쪽방촌 사랑방에 마련된 분향소.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좋은 분들의 도움으로 2019년 손해배상 소송에서 이겼는데 후지코시가 사과도 안 하고 재판을 다시 걸었다. 하긴 10원도 안 줘놓고 이제 와서 1억을 줄 리가 없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사과도 못 받고 눈을 감은 게 아쉽다. 대법원에서는 아직 아무 얘기도 없다. 처음에 23명이 함께 싸웠는데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이제 나까지 없으니 원고가 10명만 남았다. 그들도 나이가 무척 많다. 시간이 많지 않다. 아니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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