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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 뒤에 숨은 가습기살균제 국내 기업들…"미국이었다면 수십조원 배상"

입력 2022-08-16 18:09 수정 2022-08-16 18:43

국내 기업들도 '참사 책임' 크지만, 적극적 해결 의지 보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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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기업들도 '참사 책임' 크지만, 적극적 해결 의지 보이지 않아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책임 기업을 물어보면 대부분 옥시를 떠올립니다. 실제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낸 것도 옥시가 만든 '가습기 당번' 제품이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다시 추적 중인 JTBC 탐사보도팀 역시 '옥시의 두 얼굴'을 집중적으로 다뤘습니다. 하지만 옥시에만 모든 책임을 물을 순 없습니다. 옥시 그림자 뒤에 숨은 국내 기업도 여럿입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일으킨 기업들의 홈페이지 화면. 국내 기업들 홈페이지에선 '가습기 살균제 참사 관련 내용'이 담긴 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일으킨 기업들의 홈페이지 화면. 국내 기업들 홈페이지에선 '가습기 살균제 참사 관련 내용'이 담긴 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

참사 일으킨 국내 기업들 홈페이지와 사업보고서 전수조사했더니 '관련 내용 없음'

취재팀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일으킨 국내 기업들의 홈페이지와 사업보고서 등을 모두 조사했습니다. SK케미칼, SK이노베이션, 애경산업, 롯데쇼핑, 홈플러스, LG생활건강, 이마트, GS리테일 등입니다. 최소한의 반성하는 모습이 담겼는지 찾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형식적으로나마 관련 내용을 기록하고 사과하는 공간을 만든 옥시보단 나을 것이란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기업 홈페이지나 사업보고서 어디에도 반성은커녕, 최소한의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공간조차 없었습니다.

 
애경산업의 2021년 사업보고서 가습기 살균제 소송 관련 부분.애경산업의 2021년 사업보고서 가습기 살균제 소송 관련 부분.

오히려 애경은 최근(2021년) 사업보고서에 가습기 살균제 관련 소송 내용을 정리하며 "회사 경영 및 실적에 미치는 영향이 최소화 될 수 있도록 사전 준비 중"이라고 적어놨습니다. 소송 목록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일부에게 국가기관이 지원금을 우선 지급한 뒤 애경에 구상금을 청구한 내용도 있었습니다. 이런 소송들에서 회사의 손실을 최대한 줄이겠다고 적은 겁니다. 참사 피해자들보다 투자자들을 우선 신경 쓴 셈입니다. 다른 기업들도 앞장서서 ESG 경영을 강조하고 기업윤리를 언급하고 있었지만, 유독 가습기 살균제 관련 내용은 언급조차 없었습니다.

기업들 "피해자 보상 잘 해결되길 바란다"면서도 "먼저 나설 순 없다"

올해 초 '가습기 살균제 피해 조정위원회'는 9개 기업에 약 9200억 원을 내라고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옥시와 애경이 거부하면서 조정안은 사실상 무산됐습니다. 옥시와 애경은 "기업 간 분담 비율을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습니다. 노골적으로 SK케미칼이 가습기 살균제 원료 물질을 만들었으니 비용을 더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SK 측은 침묵합니다. 비용을 더 부담할 의지를 보이지도, 적극적으로 새로운 안을 내놓지도 않고 있습니다. SK케미칼 관계자는 "조정위에서 적절한 논의를 거쳐서 분담 비율을 정한 것으로 안다"고 했습니다. 적극적으로 먼저 나설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엔 "그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나머지 기업들도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조정이 다시 시작된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반복할 뿐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기업들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면서 보상 논의는 '올스톱' 상태입니다. 정부 역시 "개입하지 않겠다. 필요한 자료 등을 충분히 제공할 것"이라며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옥시 뒤에 숨은 가습기살균제 국내 기업들…"미국이었다면 수십조원 배상"

기존 조정안에 대해서도 받느냐 마느냐 의견이 엇갈렸던 피해자들은 보상 논의 자체가 멈춰버리자 너무 황당하단 반응입니다. 피해자 이재성 씨는 "ESG 경영을 한다고 했으면, 가습기 살균제 문제도 '깨끗하게 해결하겠습니다'라고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습니다. 피해자들은 옥시에 비해 다른 국내 기업들의 책임이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습니다.

"미국에서 이런 참사 벌어졌으면 기업들 수십조원 배상했을 것"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피해가 생기고 사람이 죽었는데 책임 비율을 1등, 2등, 3등으로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면서 "진정성 있게 반성하고 적극적으로 배·보상에 나서는 게 국내 기업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럽이나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천문학적인 돈을 배상해야 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실제 미국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지난해 미국 존슨앤존슨의 자회사는 발암물질인 활석이 섞인 베이비파우더 제품을 사용했다 난소암에 걸렸다고 주장하는 피해자 22명에게 21억2천만 달러(현재 기준 약 2조7700억 원)를 배상하란 판결을 받았습니다.

회사 경영진은 제품에서 석면 성분이 나온 사실을 알고도 수십 년 동안 숨겨온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심지어 '엄마들이 믿을 수 있는 제품'이라고 홍보하기도 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가 '어린이들에게도 안전하다'고 홍보한 것과 비슷합니다.

 
미국 미주리항소법원의 '존슨앤존슨 자회사 베이비파우더 사건' 판결문. 피해자 측 변호사는 ″이례적인 (배상) 액수였지만, 이례적으로 기업의 행실이 나빴기 때문에 미주리 항소 법원에서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미국 미주리항소법원의 '존슨앤존슨 자회사 베이비파우더 사건' 판결문. 피해자 측 변호사는 ″이례적인 (배상) 액수였지만, 이례적으로 기업의 행실이 나빴기 때문에 미주리 항소 법원에서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건 담당 변호사 "이례적인 액수, 이례적으로 기업 행실 나빴기 때문"

취재팀은 사건의 피해자 측 마크 라니어 변호사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라니어 변호사는 "배심원단이 베이비파우더에 석면이 들어있었고 결함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면서 "회사가 무모하거나 의식적으로 무관심하게 행동한 것도 드러났다"고 했습니다.

2조 원이 넘는 배상 판결이 나온 것에 대해선 "이례적인 액수였지만, 이례적으로 기업의 행실이 나빴기 때문에 미주리 항소 법원에서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박상인 경실련 재벌개혁위원장(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은 "이런 참사가 일어났을 때 미국에선 징벌적 배상을 아주 세게 하고, 유럽 국가에선 형사 처벌이 강하다"며 "우리나라는 민사 소송에서 징벌적 배상이 없고, 기업 범죄에 대한 처벌도 비교적 약한 게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최지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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