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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벌 주자" 피해자 3년 집념…'성관계 영상 저장' 배상 끌어냈다

입력 2021-05-20 11:00 수정 2021-05-20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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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계 영상 유포 피해자가 JTBC에 전한 입장문. [JTBC뉴스룸 캡처]성관계 영상 유포 피해자가 JTBC에 전한 입장문. [JTBC뉴스룸 캡처]
"내가 할 수 모든걸 해보자. 몇 년의 시간을 견뎌냈는데, 조금만 더 견뎌서 피고에게 꼭 벌을 주자"

성관계 영상 유포 피해자 A씨가 JTBC에 전한 말입니다. 지난 14일 서울북부지법은 A씨와의 성관계 영상을 완벽하게 삭제하기로 약속해놓고 클라우드와 외장하드에 저장했던 남성 B씨에게 3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B씨가 영상을 유포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더라도 유출이 될,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단 이유 때문입니다. 민사와 형사를 통틀어, A씨가 영상이 유포된 사실을 알게 된 지 약 3년만에 받은 첫 번째 승소 판결입니다.


■ 3년만에 이끌어낸 첫 승소
법원이 불법 성관계 영상 유포의 책임을 유포 행위 이전인 '저장과 삭제'라는 관리 단계까지 물은 것은 이례적입니다. A씨가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소송하지 않았다면 만들어질 수 없는 판례였습니다. A씨는 이 판결로 “조금이나마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며 “앞으로 죽을 때까지 영상을 삭제하며 살아보겠지만, 힘을 내보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영상을 저장하고 삭제하지 않은 전 남자친구의 책임을 물은 서울북부지법 판결 중 일부. [JTBC뉴스룸 캡처]영상을 저장하고 삭제하지 않은 전 남자친구의 책임을 물은 서울북부지법 판결 중 일부. [JTBC뉴스룸 캡처]

A씨의 고발은 2018년부터 시작됐습니다. 전 남자친구에게 완벽한 삭제를 수차례 부탁했던 자신의 성관계 영상이 인터넷을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수십여 개의 사이트에 유포된 횟수만 700여 회. A씨의 법률대리인인 김수윤 변호사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영상 삭제지원센터에서도 심각하고 희귀한 사례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A씨는 “인터넷에 한 단어만 쳐도 내 불법 영상이 미친 듯 쏟아져 나왔다”며 “손발이 떨리고 너무 분했다”고 전했습니다.

A씨는 전 남자친구인 B씨를 고소했습니다. “완벽하게 지웠다”는 B씨의 말과 달리 해당 영상은 B씨의 구글 드라이브와 네이버 클라우드, 외장하드에 분산 저장돼 있었습니다. 손해배상 판결을 한 재판부가 “원고에게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는 동영상을 (피고가) 무려 3곳의 저장소에 분산 저장해 동영상이 용이하게 유출될 수 있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판단한 이유입니다.

■ "삭제" 약속 뒤 저장검찰 "증거 불충분" 불기소
하지만 B씨에 대한 형사처벌은 어려웠습니다. 유포의 직접 증거가 없었고 B씨는 해킹을 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얼굴도 나온 만큼 자신 역시도 영상 유포의 피해자라 했습니다. 영상이 올라왔던 불법 음란물 사이트도 폐쇄돼 영상 게시자를 특정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검찰 '증거 불충분' 유포혐의 불기소, 법원 "결정적 원인제공 3천만원 배상" [JTBC뉴스룸 캡처]검찰 '증거 불충분' 유포혐의 불기소, 법원 "결정적 원인제공 3천만원 배상" [JTBC뉴스룸 캡처]
A씨는 자신의 영상이 게시된 인터넷 사이트 100여개의 링크와 해당 영상을 올린 헤비업로더 관련 정보도 수사기관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또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검사 출신인 이승혜 변호사는 “음란물 사이트의 경우 서버가 해외에 있어 압수수색 영장 집행이 쉽지 않다”며 “피해자들이 피해를 당하고도 가해자의 책임을 묻기가 쉽지 않은 구조”라 말했습니다.

B씨는 A씨의 영상 유포와 관련해선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A씨가 아닌 다른 3명의 여성을 불법 촬영한 혐의가 발견돼 B씨는 지난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습니다. 피해자는 JTBC에 “경찰과 변호사님이 저로 인해 다른 여성들의 몰카 범죄를 찾아냈으니 힘내라고 했지만, 솔직히 너무 분하고 억울했다”고 말했습니다.

■ 여죄도 드러나 "몰카혐의 집행유예"

그렇게 선택한 것이 이번에 승소한 민사소송입니다. 위자료 3000만원부터 정식 재판이 가능해 위자료를 3000만 100원으로 측정했습니다. 유포 혐의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은 남성에 대한 손해배상은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입니다. A씨의 법률 대리인인 김수윤 변호사도 “처음 소송을 할 땐 낙관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피해자 "죽을 때까지 영상 삭제하며 살겠지만 조금이나마 안도" [JTBC뉴스룸 캡처]피해자 "죽을 때까지 영상 삭제하며 살겠지만 조금이나마 안도" [JTBC뉴스룸 캡처]
1년여간의 소송이 이어졌고 상대방 측은 수사를 받을 때와 비슷한 주장을 했습니다. 인정하는 것은 동영상을 동의 없이 저장했다는 사실 뿐. 소송 과정에서 재판부가 한번 바뀌었는데 이전 재판부는 화해 권고와 2천만원의 위자료를 책정했지만 B씨 측에서 거절했습니다.

A씨는 자필로 쓴 탄원서까지 내며 소송 과정을 견뎠습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에겐 소송 자체가 엄청난 고통입니다. A씨는 “소송이라는 게 정말 힘들고 긴 것 같다”며 “피해자는 나인데 내가 왜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는지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했습니다. A씨는 최근 디지털성범죄를 다룬 드라마에서 나온 아래의 대사를 보며 펑펑 울었다고 했습니다.

"성범죄 피해자는 죽어서도 성관계를 한다"
"한 번 퍼진 불법동영상은 암덩어리같다. 아무리 지우고 지워도 계속 생겨난다"

피해자의 법률 대리를 맡았던 김수윤 변호사. [JTBC뉴스룸 캡처]피해자의 법률 대리를 맡았던 김수윤 변호사. [JTBC뉴스룸 캡처]
■ 법원, 피해자 청구 위자료 사실상 전액 인정
법원 인사로 화해를 권고한 재판부가 새 재판부로 바뀌었습니다. 이 판결을 맡은 박형순 판사는 A씨가 청구한 위자료에서 단 100원을 뺀, 사실상 전액인 '3000만원 배상' 판결을 내립니다. A씨의 손을 완벽히 들어준 겁니다. 재판부는 “동영상의 완벽한 제거가 불가능해 피해자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힘든 상황”이라며 “피고가 원고에게 진정으로 사과하거나 피해 회복을 위한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도 않은 사정을 고려했다”고 했습니다.

A씨의 법률 대리인인 김수윤 변호사는 “피해자께선 '본인과 같은 피해자들이 이번 판결 결과를 많이 알고 힘을 냈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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