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 사건 수사 당시 '사초(史草)'라는 평가까지 받은 이른바 '안종범 업무수첩'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항소심 재판에서 다시 그 증거능력을 인정받았다.
다만 재판부는 수첩의 기재 내용 가운데 박 전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지시'했다고 돼 있는 내용만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서울고법 형사4부(김문석 부장판사)는 24일 박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 항소심에서 "안종범의 업무수첩 기재가 전문(傳聞)증거(체험자의 직접진술이 아니라 전해들은 말 등 간접증거)가 아니라는 원심 판단은 타당하다"고 밝혔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비서관이 2014년∼2016년 작성한 63권 분량의 수첩은 박 전 대통령이 그에게 내린 지시 등을 받아적은 내용이다.
지시 중에는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박 전 대통령에게 각종 불법 청탁을 한 정황이나 박 전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대기업 총수와 독대 자리에서 나눈 대화 등을 추정케 하는 내용이 담겼다.
사건을 수사한 박영수 특별검사팀 등은 수첩을 '사초'(史草)라 부르며 박 전 대통령이 국정농단에 깊숙이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박 전 대통령과 최씨, 이재용 부회장 등 피고인들은 이 수첩의 증거능력을 부인하며 맞섰다.
이 수첩은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1심을 비롯해 이화여대 입시비리 사건, 최씨 조카 장시호씨 사건 등 각종 국정농단 관련 사건에서 증거로 활용됐다.
이 전 부회장의 1심에서도 삼성의 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금 16억여원에 이 전 부회장이 관여했다고 판단하는 근거 중 하나로 재판부는 '빙상', '승마' 등이 적힌 수첩 내용을 꼽았다.
당시 재판부는 수첩 내용의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일단 적어놓은 자체는 하나의 사실이라며 재판에 참고할 '간접증거'로 인정했다.
반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2심 재판부는 "간접증거로 사용될 경우 우회적으로 진실성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며 수첩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그대로 받아적은 것이라는 안 전 수석의 진술을 전제로 그 모든 내용을 '답안'으로 삼아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의 단독면담에서 나눴다는 대화 내용이 진실한지를 판단할 증거로 쓰는 것은 비약이 있다는 취지다.
이와 달리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1·2심은 수첩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다만 이날 2심 재판부는 수첩의 증거능력에 대한 원심 판단을 유지하면서도 그 내용 중 '박 전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지시한 내용'으로 인정 범위를 한정했다.
반대로 '박 전 대통령이 단독면담 이후 안 전 수석에게 불러줬다는 면담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진술의 신빙성이 증명되지 않은 경우 간접증거로 사용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같은 박 전 대통령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동일한 혐의를 뒷받침하는 중요 증거를 두고 서로 다른 판단을 내렸던 이재용 부회장 2심 재판부와 박 전 대통령 1심 재판부의 의견을 절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