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사법부 시절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준 대법관이 '대일관계' 등의 이유를 들어 자신이 내린 판결의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지시를 후배 법관에게 내린 정황이 검찰에 포착됐다.
검찰은 대법원이 강제징용 소송의 최종 결론을 5년째 미루는 데 상고법원 설치와 법관 해외파견 확대 등 사건 실체와 무관한 요인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보고 이 소송에 관여한 판사들을 불러 구체적 정황을 확인하고 있다.
1일 법조계에 따르면 이인복 전 대법관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상고심 2건에 모두 재판장으로 참여했다.
이 전 대법관이 속했던 대법원 1부는 2012년 5월 원심을 깨고 전범기업들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취지로 두 사건 모두 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 두 사건의 파기환송심은 대법원 판결대로 나왔지만, 미쓰비시중공업 등의 재상고로 이듬해 다시 사건이 대법원에 접수됐다.
이 전 대법관은 그러나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국가보상금 청구사건을 검토하며 2012년 자신의 판결을 인용하려는 재판연구관에게 "미쓰비시 판결이 이상하다", "한일외교관계에 큰 파국을 가져오는 사건"이라며 재검토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제징용 소송을 둘러싼 대법원의 이런 자기모순적 태도는 2014∼2016년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한 이모 부장판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면서 구체적으로 공개됐다. 이 부장판사는 "대법관님은 (당연하게도) 이미 상황을 다 알고 계신듯" 했다고 적었지만 해당 대법관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 전 대법관은 2016년 퇴임하고 사법연수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 전 대법관은 연합뉴스와 한 통화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파기환송 이후 판결의 문제점을 지적한 논문들이 나왔고 재상고가 되면 지적된 문제점을 전부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전 대법관은 "비판적인 논거도 극복할 수 있도록 연구를 더 해야 한다는 얘기를 재판연구관에게 했을 것"이라며 "내가 한 판결을 부정했다거나 파기 방침이 정해졌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해명했다.
재판거래 의혹을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신봉수 부장검사)는 최근 이 부장판사를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해 조사했다. 검찰은 게시글에 등장하는 대법관이 이인복 전 대법관이라는 진술을 확보하고 당시 사건처리에 미심쩍은 부분이 없었는지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검토에 참여한 다른 재판연구관 역시 "사건 배당이 지연되는 등 처리 방식이 여느 사건과 달랐다"고 검찰에 말했다.
이 부장판사가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집행정지 사건을 검토할 당시 "오로지 파기만을 전제로 한 법리검토, 법리적 상식에 벗어난 무리한 이유를 들어서까지 고집을 부려 몇 차례나 보고를 해야 했다"고 적은 대법관은 고영한 대법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두 전·현직 대법관은 최근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태와 관련을 맺고 있다.
2016년 9월 퇴임한 이 전 대법관은 지난해 3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이 불거지자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자체 진상조사를 주도했다. 당시 진상조사위원회는 의혹이 '사실무근'이라고 성급하게 결론 내렸다가 두 차례 추가 자체조사와 최근의 검찰 수사까지 자초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고 대법관은 지난해 법원의 1차 조사 이후 사태의 책임을 지고 법원행정처장 자리에서 물러나 재판에 복귀했다.
그는 법원행정처장 시절 부산지역 건설업자의 뇌물사건 재판에 직접 개입했다는 의혹도 받는다. 법원행정처는 2016년 9월 문모 당시 부산고법 판사가 정씨 재판 관련 정보를 유출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변론재개가 필요하다"는 등 재판개입이 의심되는 문건을 작성했다. 검찰은 고영한 당시 처장이 윤모 당시 부산고법원장에게 이런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대본 격인 '말씀자료'까지 생산된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은 임종헌 전 차장의 직속상관이던 고 대법관을 핵심 수사대상으로 꼽고 그의 PC 하드디스크를 제출해달라고 법원행정처에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검찰은 고 대법관이 이날 퇴임함에 따라 하드디스크 제출을 재차 요구할 방침이다.
검찰은 법원행정처가 부산 건설업자 뇌물사건 재판에 개입하고 이 건설업자와 유착 의혹이 불거진 판사에 대한 징계를 무마했다는 의혹을 수사하기 위해 법원행정처 윤리감사관실에 관련 자료 제출을 재차 요청했다.
검찰은 앞서 법원행정처가 윤리감사관실 자료의 임의제출을 거부하자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다. 그러나 압수수색 영장 역시 "임의제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검찰 관계자는 "어느 쪽으로든 자료를 받을 수 있어야 논리적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검찰은 또 "형사소송법상 국가의 중대한 이익과 관련된 공무상 비밀에 해당할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인사심의관실 압수수색 영장이 기각된 데 대해 법원행정처에 공문을 보내 직무상 비밀로 신고된 자료가 있는지 물었다.
형사소송법은 관공서에 보관된 물건의 경우 '직무상 비밀에 관한 것'으로 신고된 때 관공서의 승낙 없이 압수하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다만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승낙을 거부하지 못하게 돼 있다.
이 역시 영장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당사자가 압수수색을 허용할지에 대한 규정일 뿐 영장의 발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아니기 때문에 기각 사유로 정당하지 않다는 게 검찰 입장이다.
검찰 관계자는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하는 자료가 있다면 법원행정처가 영장 집행을 거부하면 된다"며 "다른 사건의 영장 발부 기준과는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연합뉴스)